구운몽 2014.07.20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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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어려서부터 얼굴빛이 밝고 인물이 훤하다하여, 동네의 현자(賢者)로 알려졌던 삼거리 복덕방 할아버지께선 일찍이 본인을 불러다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낮빛이 흡사 '빛좋은 개살구'와 같으니 내 너를 앞으로 개살구라고 불러야겠구나!"

 

저는 그것이 상(賞)인줄 알고 매우 기뻐하며, 그때부터 스스로를 개살구라고 자랑하고 다녔지요.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잔뜩 취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소주를 드시지 않으면 제게 말씀을 하시는 일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이 천치(天癡)놈아! 개살구가 어디 좋은 뜻인 줄 아느냐!"
"'빛좋은 개살구'란 겉만 그럴듯하고 실속 없는 사람을 일컷는 말이니다."
"것도 모르고 좋아라 떠들도 다니니, 네 놈은 진정 영락없는 개살구로구나!"

 

저는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께 천치라고 욕을 얻어 먹어서라기 보다는, 어려서부터 공경(恭敬)하던 삼거리 복덕방 할어버지께서 저를 이토록 낮추어봤나,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저는 고무신을 신는 것도 마다하고 대뜸 삼거리 복덕방으로 뛰어갔습니다. 마침 할아버지께서는 이웃의 할머니와 함께 짬뽕 국물에 밥을 말아드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지난 세월 할아버지를 생각하던 제 마음은, 유비(劉備)를 생각하는 공명(孔明)의 마음과 다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할어버지께서는 저를 제갈량(諸葛亮)은 커냥, 우둔한 안락공(安樂公) 만큼의 평가도 안하셨던 모양이더군요."

 

그러자 할어버지께서는 밥을 말던 짬뽕에서 잠시 손을 떼고는, 위엄있게 말씀하셨습니다.

 

"길게 돌리지 말고 바로 말하거라! 짬뽕은 식기전에 먹어야 제맛이니라!"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제가 그깟 짬뽕 국물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저 알아버렸습니다. '빛좋은 개살구'의 뜻을 알아버렸다구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뜨끔하시는 듯 하더니, 이윽고 다시 위엄을 갖추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물은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개살구가 어때서 그러느냐? 비록 맛은 조금 떫지만 영양가는 살구 못지 않다. 입에 단 것만 쫓는 너희 젋은 세대를 걱정하여, 너의 그 반들반들한 낮빛이 되려 독으로서 너를 타락시킬까 염려되어, 내 부적(符籍)을 쓰는 심정으로 너를 개살구라 이름 붙였느니라! 바로 알았으면 썩 꺼져라!"

 

할어버지는 다시 수저로 짬뽕 그릇을 뒤적이며,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웃집 할머니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 날 이후로 '구운몽'으로 개명을 하였지요. 할아버지의 마음은 알 것 같았지만, 계속 '개살구'라고 살다가는 장가도 가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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