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호 2014.05.16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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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동네에 신문물이라 할 수 있는 편의점은 없었지만, 오락실은 있었다.
DDR 같은 최신 게임은 없었지만, 그래도 소중한 여가 생활의 한 축이었다.

 

최신 게임을 하고 싶으면 날을 잡아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면 될 일이다.
시내에 가면 극장 구경도 할 수 있고 햄버거 등 패스트 푸드도 즐길 수 있다.


나는 아무래도 빵보다는 밥을 좋아했기 때문에, 시내에 갈일이 있을 때마다
햄버거 대신 한솥 도시락을 도련님 도시락으로다가 너댓개씩 사왔다.

 

냉동실에 소중하게 넣어놓고 생각날때마다 전자레인지로 데워 먹는 것이다.
물론 우리집은 전자레인지가 없었기 때문에 뒷집의 경석이네 것을 이용했다.


경석이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서 경석이가 자거나 없을때를 노렸다.

경석이 누나는 이런식으로 말했다.
"경석이 학원 갔는데?"


그럼 이런식으로 대답했다.
"저런! 그래요? 그럼 경석이 대신 전자렌지 좀 쓰겠습니다."
 
나는 한솥 도시락, 도련님 도시락 중에서 치킨과 생선까스가 좋았다.
햄버그는 아무리 먹어도 정이 가진 않았지만, 그래도 못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도련님 도시락을 먹을때면, 귀한 도련님이라도 된듯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에 도련님 도시락을 먹어봤는데, 크게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치킨은 그대로지만 햄버그가 떡갈비로 대체되어 있었고 (명칭만 다르지 거의 비슷하다.)
무엇보다 흰살 생선이 부드럽던 당당한 모습의 생선까스가
밀가리 투성이에 이따금 오징어 쪼가리 따위가 들어있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오징어까스로 대체 되었다.

 

생선까스에 치킨에 햄버그에, 경양식을 먹던 부짓집 도련님이
이미테이션 떡갈비에 오징어 향이 나는 밀가루 부침이나 쪼개 먹어야 한다니!
그런건 더이상 도련님이 아닌 것이다.

 

 

<2>

 

당시 동네에 신문물이라 할 수 있는 편의점은 없었지만, 오락실은 있었다.
DDR 같은 최신 게임은 없었지만, 그래도 소중한 여가 생활의 한 축이었다.

 

오락실의 한 귀퉁이에는 직업을 갖고 있지 못한 동네의 아저씨 예닐곱명이
'꽃놀이'라는 이름의 슬롯머신 게임을 하루 종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잭팟'이 터져도 백원 한 닢 나오지 않는데도, 그 허무한 행위을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시 같은 성당 청년부로 있던 여자와 오락실을 이용했는데
아무래도 그녀를 일정 부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녀와 나는 스노우 브라더스나 스트리트 파이터 같은 고전 게임을 즐겨했다.
(사실 그 오락실엔 고전 게임 말고는 있는게 없었다.)

 

하루는 떠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너는 장기에프랑 에드몬드 혼다 중에 한 명을 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택하겠어?"


그녀는 한 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에드몬드 혼다"

 

"의외인 걸, 장기에프가 좀 더 낫지 않은가?"
"장기에프는 서양인이잖아! 왠지 좀 무서워!"
"혼다는 동양인이니까, 살을 빼면 조금 괜찮을지도?"

 

나는 내친 김에, 농담인 척 하며 본심을 드러내봤다.
"그럼 너는 달심과 나랑 둘 중에 한 명을 택하라면 누구를 택하겠어?"


그녀는 조금 의외인 듯,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달심."

 

충격이었다.
내가 머리털도 없는 달심 보다 못하단 말인가!
어쩜 같은 천주교도인 나를 버리고 흰두교도인 달심을 택할 수 있을까!


그때부터 우리의 사이는 점차 소원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 역시 부끄러워, 둘러대듯 달심을 택한 걸지도 모르는데

정작 나는 달심에게 졌다는 자격지심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고

그녀에게 더 이상 편하게 접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몇년 후, 우연히 흰두교를 접하게 되었는데 (달심을 의식해서가 아니다.)
우파니사드나 UG 크리슈나무르티의 저서 등을 잃고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흰두교는 팔다리나 이리저리 늘려대고 불이나 뿜으며 공중부양 하던 달심과는
차원이 다른 고도의 정신세계를 지닌 참종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 소식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상대는 종로의 영어 강사라고 들었는데, 종교가 흰두교인지 어쩐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강사니까 돈도 잘 벌겠고,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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