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비록 흔하디 흔한 구두를 갖고 있지는 않으나 흔하지 않은 곤룡포를 한 벌 가지고 있다.


지방 도시에서 에어로빅 강사를 하시던 삼촌께서 몇년전 잠시 나의 자취방에 온 적이 있는데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곤룡포 한 벌을 내 장롱 속에 걸어 놓고는 자취를 감추셨다.

내색은 안하셨지만 정황상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연락이 안된다.


장롱에 있는 김에 곤룡포를 입어보니 나에게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수줍음이 많기에 곤룡포를 입고 외출을 한 적은 한번도 없다.


다만 집에 친구들이 놀러오거나, 특히 여자 친구가 놀러왔을때

아무렇지도 않은듯 곤룡포를 걸치고 나가 문을 열어주곤 했다.


놀라는 눈동자로 나를 보던 그들에게서 은밀한 자부심을 느꼈다.



<2>


비록 흔하디 흔한 구두를 갖고 있지는 못하나 운동화는 두 켤레나 가지고 있다.

한켤레는 바닥이 너무 닮아 작은 자갈을 밟아도 그 굴곡이 바닥에 전해질 정도이며

빗길에 방심하고 심었다가는 보도블럭의 가변 같은 미끄러운 부분을 밟았을때 자빠지기 쉽상이다.


나머지 한켤레는 꽤 새것이고 오래전 부도가 나긴 했으나, 당대의 메이커였던

코오롱 물산의 니코 보코(NICO-BOCO) 브랜드 제품이다.


역시 삼촌이 갖다 놓고 간 것인데, 아끼는 마음에 자주 신지 않다가

하루는 여자 친구와 63빌딩에 데이트를 가려고 신었더니, 안에서 묵직한게 밟히는 것이다.

연유를 알아보니 옆집 마르치스 뽀미 언니가 몰래 들어라 슬쩍 실례를 해놓은 것이다.


내부가 똥으로 문드러진 운동화를 도저히 빨 엄두는 나지않고

삼촌의 것이었던 만큼  버릴 마음도 나지않아 그대로 나두었더니

똥이 딱딱하게 굳어 다행히도 더이상 냄새가 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신을 수는 없는 것이다.



<3>


신발장 한켠에 놓여있는 똥묻은 니코 보코 운동화와

장롱 한켠에 걸려있는 곤룡포를 볼때 이따금 삼촌이 생각난다.


엄청난 악필에다 안순봉이란 이름 탓에

한석봉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삼촌이여!


삼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때 그는 무엇에 쫓기고 있었을까?

물리적인 실체, 그러니까 사람 같은 것에 쫓겼을까?

설마 비물리적인 실체, 그러니까 환상이나 망상 속의 마물에게 쫓기고 있던 것은 아니겠지?

곤룡포 같은 것을 갖다 놓은 걸 보면 왠지 걱정이 된다.


정말 쫓기는 신세였다면 아무래도 운동화가 유리할텐데,

어째서 니코 보코를 벗어 놓고, 하나 뿐인 나의 쪼리를 신고 갔을까? 


에어로빅은 완전히 그만뒀을까?

장재근을 동경하여 열정적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드러내놓고 에어로빅 학원에서 강사를 할 수는 없다고 해도

어딘가에 몰래 숨어 에어로빅을 가르치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 삼촌 이라면, 지방 도시.

이를테면 경남 마산시 내동리의 노인회관 같은 곳에서라도

밀교를 전수하듯, 노인들에게 비밀스레 에어로빅을 가르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 삼촌은 에어로빅을 쉽게 포기할 자가 아니다.

세상이 빛을 잃어 에어로빅을 금할지라도, 삼촌은 재야 강사가 되어

지하에서라도 에어로빅 연합를 조직하여 에어로빅 운동의 빛을 밝힐 건아이다.


너도나도 박찬호와 SES의 브로마이드를 붙여 놓을때

삼촌의 방문에는 언제나 장재근의 브로마이드가 붙어 있었다.


jang.jpg

?

Titl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6 작업실 사진 등 4 file 동시성 2014.08.09 750
145 "풍미녀만 아니었더라면!" 안채호 2014.08.07 821
144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하는 시복식 2 file 동시성 2014.08.06 879
143 샤파르타 송 1 호난강 2014.08.04 898
» 곤룡포, 운동화, 에어로빅 file 안채호 2014.07.26 2260
141 도일 9박10일 명상수련가다!! 3 도일 2014.07.08 1210
140 노노무라상 1 windmil99 2014.07.04 1268
139 1무 2패 탈락! 4 동시성 2014.06.27 1259
138 내일아침 한알전 내기권유 10 천일결사 2014.06.23 1454
137 아따뮤비 1 2014.06.21 1497
136 내일 아침 한러전 2 동시성 2014.06.18 1520
135 신해철 신곡 좋네요. 1 페페 2014.06.18 1467
Board Pagination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 27 Next
/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