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비의 수염과 팁 오천원, 그리고 안나 페리스

by 꾀돌이 posted Aug 02, 2013

 

 7월 30일

 rabbi_Woody_Allen2.jpg

랍비(우디 알렌)

 

하얗게 보이는 태양은 식당 창문 옆 가지런히 놓여 있는 투박한 물웅덩이로 짙은 노란색의 햇빛을 내보내고 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녀의 숨결처럼 태초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 왔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멈출 기미가 없다. 이따금 넘실대는 물결에 발맞추어 반사된 햇빛이 내 눈을 훔치고 달아난다. 나는 오래된 나무와 같이 시멘트바닥에 뿌리채 박혀있는 듯한 의자에 앉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식당 근처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돌아서고, 조금씩 조금씩 이마에 땀이 말라감을 느끼고 있을 때, 언뜻 시계를 쳐다보니 오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어서 식당 안을 새삼스레 둘러보니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음에 우울함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곧바로 우울함은 절망감으로 옷을 갈아입으려 하고 있었다. 바지를 입고 벨트 정도를 차고 있을 때 위 사진과 똑같이 생긴 외국인이 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문 위에 달아 놓은, 오각형 별이 붙어있는 조그마한 종이 연신 떨어대며 내 신경을 두 세 번 가량 자극할 때 낯선 발음의 한국말이 귓속으로 들어왔다.  "식사 되나요?"

 

한국말을 꽤나 잘했다. 푸짐한 체격의 푸른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성 외국인도 함께였다. 몰래 엿보니 여성 외국인은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수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사람은 분명 랍비일 거야!" 사실 그는 수염 빼고는 전혀 랍비 같지 않았다. 캐쥬얼한 옷차림에 카스트로나 쓰고 다닐 국방색의 모자를 쓰고 T자 모양의 나무로 만든 것이 분명한 이교도적인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옅은 흥분감을 느끼며 랍비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믿었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서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 하는 모습이 나의 믿음에 힘을 실어 주었다. 경건한 목소리의 아멘 소리와 함께.

 

메뉴판을 보고 얼마간쯤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더니 멀찍이 서서 스파이눈으로 그들을 살펴보던 나에게 눈을 맞추며 손을 흔든다. "여기 주문이요."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수록 경건한 마음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이상했다. 다가서자 랍비는 "여기 닭볶음탕 맵나요?" 나는 "어 리를" 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여성 외국인에게 "Too spicy" 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성외국인은 "Umm. I'll try" 라고 답했다. 이어서 그는 "산채 비빕밥 원. 닭볶음탕 원. 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예" 라고 말하고 속으로 "랍비님"이라고 답했다. 

 

음식을 갖다 주고 나는 멀리서 그 랍비를 관찰했다. 보면 볼수록 정이 갔다. 나는 이 감정을 아무에게라도 내비치고 싶었다. 기어코 같이 일하는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저 랍비하고 사진 찍고 싶어" 그는 "랍비?" 라며 의아해했다. 나는 아차 싶었지만 냉정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응. 저 사람 랍비야." 그는 "아 정말?" 이라며 그 외국인을 주의 깊게 쳐다본다. 그리고는 "넌 랍비를 좋아하는구나?. 내가 가서 같이 사진 찍자고 말해줄까?" 라며 웃었다. 나는 순간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질 않았다. 무엇보다 랍비 스스로 수치심을 느낄까 봐 그것이 겁났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수치심은 나 자신에게 있었다. 나는 "아니야. 싫어할까 보아."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그래?" 라고 받아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더 강력하게 권유하지 않은 그에게 약간의 증오를 가졌으나 자신을 타일렀다.

 

랍비와 여성 외국인은 식사를 마치고 값을 치렀다. 여성 외국인이 첫 차례로 나갔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였다. 그가 식당 문을 나설 때 나에게 말했다. "수고하세요" 나는 "굿바이. 굳 트립" 이라고 답하며 어정쩡한 묵례를 했다. 나는 곧 굳 트립이라고 말한 것을 후회하였다. 그리고 그의 수염을 생각했다. 그의 목걸이. 아멘의 발음. 그의 모자. 그의 티셔츠. 순간 나는 그가 오기 전까지 우울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망으로까지 번지려는 수작에 당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 랍비가 왔다. 기도 했고 식사를 했으며 돈을 치르고 물을 마시며 요지를 집었다. 그리곤 떠났다. 그가 떠난 후 나는 퍽 유쾌해짐을 자각했다. 이어 생각했다. "내 마음은 하얗게 보이는 태양이 내보내는 짙은 노란색의 햇빛처럼, 끝이 없는 그녀에 대한 사랑같이 언제나처럼 맑을 것이다. 내가 그를 랍비라고 믿고 있는 한."

 

 

8월 1일

Anna.jpg     

<안나 페리스> 

 

"손님 들어오는 것이 가뭄에 단비라. 문이 열리고 덥석 들어오면 좋다가도 막상 자리에 앉아 뚫린 입은 셋인데 둘만 시키는 꼬라지는 또 밉상이라. 사람 마음이 이리 간사할꼬. 그쟈. 꾀돌아?"

 

나는 마음이 선뜻하였다. 불시에 습격을 받은 것처럼 머릿속이 뒤범벅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팅팅볼 마냥 할 말을 찾아 머릿속을 이리저리 굴려보았으나 마땅한 대답이 나올 리 없다. "예.헤.하.네."  때마침 손님이 꽈리고추멸치볶음에서 꽈리고추만 더 달라고 외쳤다. 나는 기뻐 쏜살같이 달려가 받들었다. 나는 인간관계가 마비된 사람이라고 추정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아무튼 꽤 서투르다. 이것은 아마도 나의 잠재의식 속에 존재하는 어떤 압력에 의해 돌발 되는 반응이라고 생각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기에 속단할 수는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 국적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영국 아니면 미국으로 추정되는 남녀 외국인들과 예쁘장한 한국 여자가 소나기를 피하듯 식당 안으로 잽싸게 들어왔다. 밖을 보니 해는 쨍쨍하였다. 한국 여자는 "여기 술만 마시고 갈 수 있나요? 한 이십 분이면 되는데" 라며 숨을 헐떡였다. 나는 무심하게 "예." 라고 말했다. 이들은 문 바로 옆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메뉴판을 보더니 예쁘장한 한국 여자가 주문을 한다. "여기 찹쌀 동동주 달죠?"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그리고 "동동주가 달았나?"하는 생각에 머뭇거리다 "막걸리랑 비슷하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 여자가 "막걸리랑은 다르죠. 동동주가 좀 더 달죠! 동동주 하나 주시구요." 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이럴 거면 물어보질 말지!" 라며 분을 삭였다. 이어 여자는 "하이트 두 병도 갖다 주세요."라고 시켰다. 나는 "여기는 카스 밖에 없는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국여자는 남성 외국인에게 "이 식당에는 카스 밖에 없습니다. 괜찮습니까?"라고 영어로 주절거렸다. 남성 외국인은 "왓 카스?"라고 말하며 웃었다. 한국 여자는 "카스는 한국의 맥주 상표입니다. 하이트. 카스. 오비..." 라고 말을 하던 중 남성 외국인이 한국 여자의 말을 끊고 "오. 그레이트. 댓츠 오케이!"라며 웃었다. 웃는 모습이 퍽 멋졌다. 무심코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여성 외국인을 보았는데 굉장한 미인이었다. 정말 안나 페리스와 꼭 닮은 것이 눈이 왕방울만 하고 페르시아 사막을 떠올리게 하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한국 여자는 주문만 하고 들어올 때와 같이 잽싸게 나가버렸다.

 

사모님은 "참나. 안주도 안 시키고 술만 먹는 것들이 어딨어!?" 라며 분해 하셨다. 그리곤 여성 외국인의 앞으로 가더니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아이 참. 예쁘기도 해라. 어쩜 얼굴이 이렇게 예쁠까?"라며 감탄하셨다. 여성 외국인은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고 남성 외국인과의 대화에 신경을 쏟고 있는듯해서 사모님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쌩긋 웃으며 답했다. 사모님은 부엌 아주머니에게 "야! 이리 와서 봐봐라! 어쩜 이렇게 예쁠까!?"라며 흥을 돋우셨다. 나는 멍하니 서서 생각했다. "사모님은 어떤 인생을 사셨을까?" 이윽고 남녀 외국인은 술을 다 마시고 값을 치르려는 듯 날 불러냈다. 나는 "피프티." 라고 말했다. 남성 외국인은 오만 원짜리를 내밀었다. 나는 삼만 오천 원을 거슬러 남성 외국인에게 주었는데. 갑자기 남성외국인이 오천 원을 테이블에 내밀며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나는 "아니요. 아니에요."라고 말하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남성외국인이 난처한 낯빛을 내비치자 나는 몇 년 전 박진영이 티비에 나와서 했던 말이 섬광처럼 펼쳐졌다. "계약을 하러 어셔의 집에 가게 되었는데. 미국인들은 겸손한 것을 싫어한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인들은 가진 것이 없어도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어셔 앞에서 당당하게 굴었죠!" 나는 테이블에 있는 오천 원을 집고 "Thank you. Sir"라고 말했다.

 

나는 한동안 의자에 앉아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되새기고 있었다. 오천 원을 집으려 테이블에 손을 대는 순간 수치감이 어깨에까지 타고 흘러내렸다. 갑자기 심장에 칼을 마구잡이로 쑤셔 박는 이미지가 그려졌으나 금세 개구리처럼 팔짝팔짝 뛰고 싶은 충동으로 몇 단계 누그러들었다. 그렇지만 나아진 건 없다는 강박감이 머리를 지배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 종로5가 우체국 옆에선 스웨이드의 뷰티풀 원이 흘러나오고 조금 더 걸어가니 핸드폰 싸게 파는 집에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최신가요가 조근조근 새어나왔다. 2초 뒤 도로를 달리는 오토바이의 배기음 소리가 귀를 울리고 동시에 "오토바이의 배기음 소리가 귀를 울리고"라는 문장이 생각났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전에 다니던 성당의 수녀님이 보인다. 횡단보도 중간에서 서로 마주친다. "잘 지내니?". "네. 안녕하세요" 스치며 지나간다. 마주친 시간은 1초도 체 되지 않는다. "웃는 얼굴로 말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잠깐 멈췄어야 했나"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상대편도 멈추는 기색이 없었다. 더군다나 횡단보도이다.  

 

집 근처 우리 축산에서 팁으로 받은 오천 원으로 앞다릿살 4,000원치를 달라 해 구매했다. 그리고 남은 천원으로 그린 마트에서 생수 한 병을 사기로 했다. 그린 마트에 가니 삼다수는 천원이고 석수는 팔백 원이다. 삼다수를 살까 하다 이백 원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석수를 들었다. 봉투를 준다는 말에 "아뇨. 됐어요"라고 말했으나 점원은 "네?" 라며 의문투성이의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하며 그린 마트를 나와 언덕길을 올라갔다. 집에 도착해 쌀을 씻고 전기밥솥에 코드를 꽂았으며 쾌속 버튼을 눌렀다.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고 샤워를 했다. 고기를 구웠으며 그릇을 씻었다. 밥을 담았고 고기를 고추장에 찍어 밥과 함께 먹었다. 냉장고에서 썩어가던 꽁치 김치찌개를 앞다릿살을 담아온 검은 봉지에 담았으나 봉지에 구멍이 나서 국물이 새어 나왔다. 더욱 튼튼해 보이고 훨씬 큰 하얀 비닐봉지를 찾아내 덮어 씌었다. 목에 알맞게 베개를 정돈하고 쭉 하고 몸을 뉘였다. 배가 부르고 별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선풍기 바람 속으로 한없이 침잠해 들어간다. 수없는 다짐을 하고 희망에 몸을 맡기고 언젠가 어떤 것에 대한 맹세를 지키려고 노력한 나의 인생에서의 하루가 잿빛으로 물들며 시간의 뒤편으로 넘어가려 한다. 잿빛으로 물들어간 나의 하루들은 언젠가는 본래의 빛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Comment '2'
  • 동시성 2013.08.02 22:17
    삼다수가 일천원이면 상당히 저렴한 것이다. 알다시피 삼다수는 제주도의 청정수이다.
    고작 이백원 때문에 발암물질인 브롬산염이 검출되기도 했던 진로 석수를 선택하는 것은 지나친 배금주의 혹은 구두쇠가 아닐까?
  • 꾀돌이 2013.08.03 03:17
    이백원은 백원만 보태면 당 떨어졌을 때 급하게 초코파이 한 개를 사 먹을 수 있는 요긴한 돈이다. 나는 앞날을 생각해 저금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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