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이의 인생 경험담이 젊은이들의 혀에 착 달라붙지 않을 거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고바우의 인간만사(人間萬事)> 제 1장을 게재한 후, 이 정도로까지 반응이 미적지근할거라 예상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지킨스란 이름의 젊은이 하나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댓글을 달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충격이었다.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서도 늙은이의 경험과 지혜가 이렇게까지 값싸게 취급받는다는 건 새삼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이 까짓걸로 멈추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 다름아닌 고바우 고병욱이로다!
 
<고바우의 인간만사(人間萬事)>의 연재를 허락해주신 아베스타 아츠의 얼룩말 주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언제나처럼 본인의 글에 화려한 날개를 달아주시는 한결같은 삽화가 임형순 여사께도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고바우의 인간만사(人間萬事)  <제 2장 - 로스트 아일랜드>
 
 
나 고바우 고병욱이가 젊은 시절, 마장동 언덕 꼭다리에 있는 적갈색 주택을 한채 구매하여 호탕하게 인간 승리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앞서 게재한 제 1장을 읽어봤다면 이미 숙지되어 있을 것이오.
 
주택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바로 안방, 이 고바우 고병욱이가 처음 구매한 고바우가의 안방을 소개할 것 같으면, 비록 벽은 사방이 다 제멋대로 기울어져 있고 벽지와 장판 또한 노오랗다 못해 검거나 붉어 호기심에 혀를 대보면 달달한 중금속 맛이 났지만서도, 모름지기 방의 꽃이라할 수 있는 창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요즘 애들 컴퓨터 오락할때 쓰는 전자 모니터 보다도 작은 직사각이었지만, 거기서 드는 볕 만큼은 이후에 살았던 모든 집보다도 남달리 운치있고 따땃했던 기억이오.
 
그 창에서 드는 볕을 맡으며 벼랑빡에 기대있다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자주 났는데, 아버지께서는 하시던 장사마다 늘 그르치시어 한평생 샛방만을 전전하셨으니 아들이 장만한 호릿한 적갈색 주택, 그 아랫목에 한 번 눞혀드리지 못한게 영 아쉬웠기 때문이오.
 
살아생전 아버지께선 소주를 잡수시면 곧잘 “내 비록 현재 쪽방에 사는 신세이나 저기 한강 남쪽의 압구정 땅은 본래 우리 집안 땅인 것이다! 비뚫어진 세상!” 하시며 탄식하셨소. 자세한 연유를 들어보니 이랬소.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께선 비록 웅장하진 않으나 제 가족 눕힐 수 있는 민가 한채와 얼마간의 밭을 가지고 계셨소.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을축년, 나의 아버지가 태어나기 단 하루 전, 그 마을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홍수가 일어났는데 할아버지는 만삭인 할머니를 데리고 간신히 몸만 피했다더군.
 
이름모를 헛간에서 아버지는 나셨고 산후조리가 필요한 할머니와 친척집에 맡겨진채 할아버지 혼자서 마을로 돌아가보니 이게 왠 걸, 마을이 온통 쑥대밭, 아니 모래밭이 되어있는 것 아니겠소. 거기는 사실 육지가 아니라 삼각주로 형성된 한강의 섬이었는데, 대홍수에 통째로 지면이 쓸려버렸던 것이오. 위치는 지금의 옥수동과 압구정 사이 강물 위에 떠있었다 하오.
 
민가와 밭은 물론이요, 세간살이마저 몽땅 잃어 빈털털이가 되었지만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그날부터 우리 집안의 샛방살이가 시작된 것인데, 고단함과 설움에 지친 아버지께선 어릴때부터 할아버지의 민가가 있었다던 그 전설속의 모래섬 위에 올라 자주 눈물을 흠치셨다고 했소. 
 
허나 야박한 인생은 그마저도 허락치를 않고 4공 초기인 1972년, 아버지 마음의 고향이었던 그 모래섬 마저 건너편 압구정의 아파트먼트 개발을 위해 몽땅 매립용으로 퍼다 써버린 것이요. 저자도란 이름의 섬은 그렇게 영원히 망실되어 버렸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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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강만 바라보던 아버지는 그후 몇년 뒤 그 자리에 성수대교가 들어서자 술만 드시면 어린 나를 끌고선 옛 할아버지의 집이 있었다던 바로 그 지점의 대교에 올라 기묘한 가락의 노래를 부르곤 하셨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엔 나 고바우 고병욱이도 이따금 그곳에 올라 아버지가 불렀던 기묘한 노래를 조심스레 더듬어보곤 했었지.
 
옛 희랍의 철학자는 사라진 섬 아틀란티스를 기억했다네
나 조선의 고병창이도 사라진 섬을 기억하네
그 섬의 이름은 저자도
뽕나무의 일종인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로 불렸었지 
 
아버지 마음의 고향이 저자도였다면 나 고바우 고병욱이의 마음의 고향은 바로 성수대교였다오. 성수대교 중에서도 아버지와 나의 추억이 쌓인, 옛날 할아버지의 민가가 있었다던 바로 그 위치, 북단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가 특별히 나의 고향이었던 것인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지난 94년 어느 가을날, 정확히 바로 그 지점인 북단 5번째와 6번째 교각 사이, 바로 고 부분만 골라 폭삭 가라앉아 버린게 아니오!
 
믿을 수가 없어 당시엔 눈물도 나오지 않았지, 당시엔 그랬어. 요즘에도 술에 취하면 생각이나 진작에 전부 헐리고 새로 세워져 낯설게 번쩍이는 성수대교에 오르는데, 공허해진 마음으로 아버지처럼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른곤 한다네.
 
조부의 가택은 큰물이 닥쳐 흔적도 없이 모래벌판 되었네
아비의 삼각주는 영락없이 헐려 빈 강물이 되었네
강물 위 나의 철교는 어느날 뚝하고 잘려나갔네
여기야 말로 극동의 버뮤다 삼각지대가 아닐란가!
Commen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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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동이 2013.03.12 19:41

    오, 이야기가 부쩍 흥미로와졌습니다.
    고바우 선생, 
    앞으로도 그 연륜이 베어나오는 체험 수기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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