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 2013.12.23 03:47
조회 수 2100 댓글 0

chiken.jpg

 

<1>

 

제 나이도 어느덧 서른을 향해 다다르고 있으니, 이제 더 이상은 어린애가 아닙니다. 잠을 자면 여전히 들개 따위에 쫓기는 꿈을 꾸고는 하지만, 물리적으로 틀림이 없는 어른인 것입니다.

 

게다가 노안에 속하는 편이니, 어른 중에서도 청년 보다는 아저씨에 속할 것입니다. 어제 길에서 잠깐 어깨를 부딪혔던, 특정 종교 단체를 홍보하던 어느 처자도, 저를 아저씨라 칭하지 않았겠습니까! 모름지기 아저씨라면 일정한 체통을 지켜야 합니다. 아무래도 아저씨라면 닭 튀김 따위를 두고 왈가불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동생은 오늘도 분명히 양념 통닭을 시켰을 것입니다. 아까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서는 "오빠! 통닭 시켰으니까 얼른 들어와!"라고 절 조롱한 것을 보니 분명합니다. 동생은 양념 치킨은 '통닭'이라고 부르고, 후라이드 치킨은 '치킨'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저는 벌써 십년 가까이를 동생에게, 진정한 치킨은 후라이드 치킨이기에 네가 아무리 양념을 좋아한다 해도 일곱번 중 네번은 후라이드를 시켜야 옳다고 반복적으로 말했으나 동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럴때마다 화가 나서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지요.

 

"너는 계집애가 순수치를 못하고 때가 탓다. 어쩜 우유를 마셔도 쵸코만 마시고 치킨을 시켜도 양념만 시키느냐?!"

 

그럼 동생은 이런식으로 응대합니다.

 

"후라이드나 양념이나 기름으로 다 처범벅한거야! 순수한 걸 먹으려면 허연 백숙이나 처먹지 그래?!"

 

이러한 상황들을 반복하며 저는 마음속으로 절대 동생 같은 여자와는 사귀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또 후라이드 치킨 보다 양념 치킨을 좋아하는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지요.

 

 

<2>

 

사나흘 전에 놀랍게도 한 친구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친구의 친동생이 열흘 전 즈음, 족발 거리 앞에서 어깨를 부딪혔던 특정 종교 단체의 어여뿐 처자였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딱히 신기할 것도 없습니다. 이 정도는 별 우연도 아닌 것이며, 종교 단체의 처자인 친구의 동생은 저와 어깨를 부딪혔다는 사실을 기억조차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친구의 동생이 아니라 친구이겠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친구 보다는 친구의 동생에게 자꾸 신경이 쓰입니다. 친구는 (또 친구의 동생은) 다행히도 양념 치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그와 마찬가지로 후라이드 치킨 역시 좋아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육류 자체를 거의 먹지 않습니다. 먹어봤자 이따금 양고기를 조금 먹을 뿐인데, 그것도 굽거나 튀긴 것 보다는 찌거나 삶은 것을 선호한다고 하네요.

 

truke.jpg

 

그의 가족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문제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아마 양고기 맛은 거기서 배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친구의 동생은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투르크메니스탄 전통춤을 추고 다닐 정도니까요.

 

어쨌든 저는 크게 반성했습니다.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취향의 사람들이 있으며, 고기만 해도 양고기, 말고기, 캥거루고기, 야크고기 등 쉽게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데, 고작 닭 튀김 따위를 두고 왈가불가하다가, 양념 보단 후라이드를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야지 하고 다짐했으니, 저란 인간은 얼마나 경솔하고 시야가 좁은가요!

 

제 나이도 어느덧 서른을 향해 다다르고 있으니, 이제 그에 맞는 체통을 지켜야합니다. 이제 더 이상은 동생과 닭 튀김 따위로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그런 졸렬한 모습을 본다면, 고기 중에서도 삶은 양고기만 먹는다는 투르크메니스탄 출신 친구가 (혹은 그의 여동생이) 눈쌀을 찌프릴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담이지만 후라이드 치킨 임에도 개인적으로 양념 치킨보다도 더욱 불온하다고 여겨지던 것이 있는데, 바로 크리스피 치킨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설사 동생이 크리스피 치킨을, 그것도 가슴살만 발라낸 뻑뻑하게 만든 순살 버전으로 시켜 먹는다 해도, 결코 성내지 않을 것입니다.

 

후라이드, 양념, 오븐, 마늘, 간장, 훈제 등 갖가지 종류와 버전이 있다 해도 치킨은 그저 치킨일 뿐입니다. 돼지, 소, 양, 말, 토끼, 거북 등 세상의 수많은 고기들에 비해면 그저 닭요리의 한 형태일 뿐이고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무궁한 이 우주와 광대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치킨이 갖고 있는 비중은 미미하다면 미미할 뿐, 적어도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닭을 튀길 때의 방식이나 반죽, 양념 따위에 혈안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연연하지 말아야지요. 그저 스윽 바라보고 얼추 적당한 것을 집어먹으면 그만입니다. 그게 바로 치킨을 대하는 어른의 자세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