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에서 솟아오른 땀방울이 홀쭉한 뺨을 타고내려 턱밑에 매달려 있었다. 남박사는 오래된 백열전구에서 점멸하는 광선을 떠올렸다. 위태롭게 턱밑을 붙잡고 있던 두세 개의 땀방울들은 하나둘씩 낙하해 마른 사각보도블록에 점을 찍었다. 전구의 필라멘트 또한 끊어져 남박사의 머릿속은 캄캄해졌다. 남박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남박사는 자신의 낡은 남색 바지 왼쪽 주머니와 오른쪽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권총 따위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박사가 뻘뻘 땀을 흘리며 서 있는 이화동 삼거리엔 아랍인은 없었다. 대신 근처 이화벽화 마을을 구경하러 온 중국인 관광객 십여 명이 일렬로 줄을 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남박사는 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중국인은 안돼," 

 
아랍인을 만나기 위한 최단 시간의 방법은 저쪽 편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잡아타 간절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태원으로 갑시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택시기사가 무슨 일이냐며 다소 걱정하는 투로 질문할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라고 지나가던 누군가가 남박사에 귀에다 소리쳤다. 순간 남박사는 천둥과 번개가 치는 줄 착각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산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그리고선 아련해졌다. 남박사는 "매우 개인적인 일이라 답하기 곤란하군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씀해 드리지요. 24시간 안에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요."라고 답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남박사에겐 현재 단돈 이천 원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택시를 탈 수 없었다. 택시를 타려면 기본적으로 삼천 원 이상이 필요했다. 남박사는 한숨을 쉬며 손사래를 쳤다. "물이나 한 병 사야겠다." 
 
현대그린 마트에서는 몇 년째 제주 삼다수가 천원이었다. 남박사는 제주 삼다수를 집어 들고 계산대 근처에 있는 꽤 널직한 사각 냉동 박스에서 유년시절 매우 반복적으로 섭취하던 아이스크림인 "더위사냥"을 골랐다. 계산을 마치니 몇백 원의 동전이 남박사의 손에 쥐어졌다. 남박사는 동전을 들고 성큼성큼 골목길 구석으로 움직였다. 남박사는 골목길 모퉁이 웅크리고 있는 하수구 철망을 향해 손안에 있는 동전을 모조리 던져버렸다. 그리고선 외쳤다 "안녕. 안녕. 잘 있거라. 세상아! 안녕. 안녕. 잘 지내라. 내 사랑!"
 
더위사냥은 약간의 뒤틀림이 있는 길쭉한 형태의 사각형 모양으로 되어있고 정중앙을 두르고 있는 띠를 벗겨내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먹을 수 있다. 정중앙을 중심으로 두 동강을 내서 친구와 하나씩 나눠 먹을 수도 있고, 친구가 없다면 개에게 줄 수도 있다. 혼자서 먹고 싶은 사람은 두 개로 나뉜 더위사냥 중 우선 하나를 재빠르게 먹고 약간 녹은 나머지 하나를 먹을 수도 있지만, 남박사는 두 동강을 내지 않고 한쪽 껍데기만 섬세하게 벗겨내어 길쭉한 형태를 유지하며 먹는 방법을 제일 선호했다. 유년시절 더위사냥을 구매 할때면 언제나 옆에서 거지 친구가 한쪽을 달라고 요구했는데,. 그럴 때면 남박사는 언제나 두 동강을 내지 않고 더위사냥을 하나 더 구매해 거지 친구에게 주며 꼭 한마디씩 했다. "열심히 살아라." 물론 거지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도 잊지 않았다.
 
사실 남박사는 두 동강을 내는 방법을 혐오했다. 엄마가 무심코 더위사냥을 두 동강 낼 때면 남박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악을 쓰며 울었다. "이놈의 망할 집구석!" 남박사의 외침이 다락방에 세 들어 살던 병태 아저씨한테까지 도달하면 병태 아저씨는 다락방에서 내려와 남박사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러면 남박사는 금세 조용해져 병태 아저씨의 무릎에서 잠을 자곤 했다. 남박사는 그때 아저씨가 불러 주었던 노래의 멜로디를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가사만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 남박사는 기분이 울적하거나 심심할 때면 소주를 먹곤 하는데 그럴 때면 언제나 그 노래를 개사해 부르곤 한다. "옆집에 살던 개 이름 빙고라지요오. 비 아이 엔지오. 비 아이 엔지오. 비 아이 엔지오. 빙고는 개 이름."
 
남박사는 제주 삼다수가 담긴 검은 봉지를 들고 남아있는 한쪽 손으로 더위사냥을 깨물며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걷고 있었다. 남박사의 오른편 도로 옆 주차되어 있던 회색 싼타페의 조수석 창문이 스르륵 열렸다. 남박사는 창문이 열리는 것이 마치 홍콩 액션 영화에서 나오는 슬로우모션처럼 느껴졌다. 차 안에는 선글라스를 쓴 사십 대 초반의 풍채 좋은 아주머니가 남박사를 보고 있었다.
 
"삼춘!" 남박사는 1초간 정적 속에 머물렀다. 그리고선 회색 싼타페 쪽으로 걸어가며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아주머니. 날씨가 매우 덥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사를 마친 남박사는 더위사냥을 한 입 깨물어 먹었다. 아주머니는 "삼춘. 방세 어떻게 할 거야?"라고 말했다. 적의가 있거나 야유, 조소,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요소가 없는 오히려 친절과 안쓰러움, 동정이 묻어나는 따뜻한 말씨였다. 남박사는 "매우 죄송하군요. 아주머니. 그렇지만 세계 겅제가 이러이러하니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현재로썬 방세를 지급할 여력이 없으나 앞으로 몇 달간의 기간을 주시면 밀렸던 방세를 한번에 지급할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어떻게? 어디서 돈 구할 데는 있는 거야? 보아하니 지금 일도 안 하는 것 같은데." 라고 물었다. 남박사는 "지네를 잡아 말리면 매우 좋은 약재가 됩니다. 맛도 좋고 몸에도 무척 좋습니다. 이것을 종로3가 노인들에게 팔아 방세를 내지요. 그리고 비둘기를 포획해 푹 고아 고기는 소금 찍어 먹고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머리가 좋아집니다. 수험생들에게 팔면 돈이 됩니다."라고 설명했다. 
 
아주머니는 "그럼 빨리 좀 부탁할게. 삼춘. 꽤 많이 밀렸잖아."라고 말했다. 남박사는 되물었다. "깨요?" 아주머니는 "아니. 아니, 꽤 많이 밀렸다고."라고 재차 말했다. 남박사는 재차 되물었다. "폐요?" 아주머니는 "꽤!. 꽤 많이!." 라고 외쳤다. 순간적으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남박사는 "아아. 꽤요. 네. 그렇습니다. 꽤 많이 밀렸습니다."라며 이제 이해가 간다는 듯이 안심하며 말했다." 아주머니는 "그럼 부탁할게. 삼춘." 이라고 말하며 창문을 올렸다. 남박사는 올라가는 창문 사이로 운전석에 앉아 있는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남박사는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느라 그 사내를 인식하지 못하였었다. 창문이 끝까지 닫히고서야 남박사는 그 사내가 한 번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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