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다락방

by 구운몽 posted Feb 08, 2015

 

한 겨울을 어쩌다 다락방에 갇혀 지내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집이 재건축을 하게 되었는데, 본래는 입동 때 시작해서 입춘 때면 끝날 예정이었는데, 공사에 차질이 생겼는지 완공 시기를 물어도 묵묵부답입니다.


부모님과 여동생을 따라 당백숙네 집에 갈까 생각해봤지만, 한 계절을 통째로 당백숙과 함께 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두려워, 변두리 마천동에 사는 친구집에 머물기로 하였습니다. 월세 35만원짜리 단칸방이긴 하지만, 친구와는 고교시절부터 막역하게 지내던 사이라 높으신 당백숙네 보다는 편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친구에게는 혼인을 약속한 애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친구의 애인은 열쇠를 따로 가지고 있어, 언제든 불시에 방문하기 때문에, 저로서는 한가롭게 테레비라도 보며 누워있다가는 혼이 날 것만 같아, 결국 다락방에 숨어 들게 되었지요.


친구의 애인은 친구가 출근을 했을때도, 불쑥 친구 집에 와서는, 흡사 우렁각시처럼 솜씨 좋게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해놓기 때문에, 저는 언제나 다락방에 숨어 있어야 하는 처지입니다.


보일러도 나오지 않는 다락방에서 기름 히터 하나로 겨울을 버티고 있자니, 추위도 추위지만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천장이 낮아 앉을 수가 없어 늘 누워만 있어야 하니, 덕분에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이 아프다는 겁니다.


물론 친구는 사정상 제가 집에 머물거라고 애인에게 미리 말을 해놓은 모양이지만, 주변머리가 없는 제가 어찌 친구의 애인과 살값게 인사를 나누고, 더러는 요리까지 받아 먹으며 실실댈 수 있겠습니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대낮에 출근도 하지 않고 남의 집에 얹혀 있는 한심한 놈으로 보일까봐 두려워, 차라리 다락이 속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러다보니 어느새 친구가 퇴근해도 내려오기가 괜시리 멋적고 해서, 사실상 하루종일 다락에 있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친구가 있을때는 식사 등, 최소한의 인간 삶이야 영위할 수 있다지만, 친구의 애인이 와있을땐 불편이 막중하며,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아무래도 용변이 마려울때 입니다.


소변이 마려울때는 준비해 놓은 수통에 보기야 보지만, 다락의 천장이 낮아, 앉은 것도 업드린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에서 소변을 봐야하니 여간 힘들지가 않습니다. 더군다나 행여 소리라도 들릴까 두려워, 소변 줄기가 수통의 벽면을 타고 흐르도록 하는데, 대단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작업이지요.


그래도 소변은 양반이라면 양반입니다. 대변의 경우는 아예 보지를 못하니 말입니다.


처음에는 신문지 위에 보고 비닐 봉지로 싸놓을까 생각했지만, 밑에층으로 냄새가 새어 나갈까봐 두렵기도 하고, 무엇보다 역시 천장이 낮아 앉을 수가 없으니, 옆으로 눕거나 업드려서 봐야 하며, 그것도 아니라면 등을 아치형으로 뒤집어 펴는 요가자세를 취해야 할 판이니,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범위다 싶어 포기했지요.


대신에 두 손을 모으고 무력하게도 중얼거릴 따름입니다.


'제발, 빨리 가주세요. 급합니다. 제발, 빨리 가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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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불행중 다행으로 다락에는 초등학생 실내화 가방 만한 작은 창이 하나 나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그 창을 통해, 친구의 애인이, 친구가, 학생들과 직장인들이, 노인들과 고양이들이 골목길을 오고가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재미라면 재미입니다.


또한 다락이라는 한정된 장소에 있다보니, 평소에는 읽지도 않았을 고전 소설 따위를 읽게 됩니다. (친구의 다락에는 철지난 책들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었으며, 이번주엔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읽고 있습니다.


'1984'를 읽던 저번 주에는, 그 압도적으로 공포스러운 소설속 상황에 비추어 보니, 지금 내가 누워있는 다락방이야 말로 천국이구나, 자위할 수 있었습니다만,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읽고 있는 이번 주에는, 어서 여기를 탈출해야 하질 않을까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


사실상 다락방이란 독방에 수감된 신세가 되었으니, 왠만한 유치장이나 구치소도 이 곳보다는 나을지도 모릅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평소 관심에 없던 비소설도 읽게 되는데,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김대중의 '옥중서신' 같은 것에만 손이 갑니다.


그렇게 안하던 독서도 하고, 홀로 사색도 하게 되니, 스스로 독백해 보는 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용기를 가져야겠다! 당백숙이 두려워, 친구와 친구의 애인이 두려워, 세상이 두려워, 이렇게 철창 아닌 철창 신세를 지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상을 위해,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 중생을 위해, 스스로 갇히기를 마다하지 않는 판국에, 이렇게 두려움에 갇혀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최근에는 용기를 갖고 변화를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써보고 있습니다. 어렸을때 있었던 쳐다보기도 싫었던 트라우마에 접근해 보기도 하고, 어쩌면 전생일지도 모르는 무의식 속의 지옥 같은 곳에 접근해 보기도 합니다. 상처를 극복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보기도 합니다. 어쩔땐 이 겨울, 계획에도 없던 다락방에 갇힌 것이, 저에게 필요했던 시간을 갖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제 입춘도 지났고 여전히 혹독하게 춥지만 구획상 분명한 봄이 왔습니다. 나 역시 겨울을 떠나 보낼때가, 지긋지긋한 인생의 다락방을 벗어날때가 된 것입니다. 마음을 먹고 다락과 방을 연결하는 미묘하게 좁고 얇은 계단을 밟아 보려고 합니다. 설사 싱크대 앞에서 친구의 애인과 맞닥뜨린다 해도 도망치지 않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인사를 건내보는 겁니다.


일요일 새벽입니다. 친구는 어젯밤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곤하게 자고 있는건지 주위가 고요합니다. 저는 밑에 층에 내려가서 조심스럽게 데스크탑을 켤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저학년용 공책에 모나미 볼펜으로 눌러 쓴 이 글이, 만약 인터넷에 게제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본다면, 아마도 저는 다락방 탈출에 성공한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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