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2015.02.0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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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킨스(David R. Hwakins, 1927~2012)

 

 

데이비드 호킨스(David R. Hwakins) 박사님의 모든 저서에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설명한 '자전적 기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전문을 올립니다.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자전적 기록' 

 

이 책에서 전한 진실은 과학적으로 얻어 낸 결과를 객관적으로 정리한 것이지만, 모든 진실이 그렇듯 개인적으로 먼저 경험한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시작되어 평생 동안 이어진 강렬한 자각 상태로부터 주관적 깨달음의 과정이 우선 열정을 얻고 그런 다음에는 방향을 얻더니 마침내는 이렇게 차례로 책을 써내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세 살때 불현 듯, 존재를 완전하게 의식했습니다. "나는 존재한다."의 의미를 비언어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했습니다. 곧이어 '나'가 아예 존재하게 되지 못할 수도 있었음을 깨닫고 겁에 질렸습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의식이 있는 자각 상태로 한순간에 깨어난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개인적 자아가 탄생했고, '있다'와 '있지 않다'의 이원성을 주관적으로 자각했습다.

 

어린 시절부터 사춘기 초기까지 존재의 역설과 자아의 참모습에 대해 내내 관심이 갔습니다. 개인적 자아는 때로 더욱 큰 비개인적 큰나(참나)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고, 그러면 비존재에 대한 최초 공포, 즉 무에 대한 근본적 공포가 되살아나곤 했습니다.

 

1939년에 저는 위스콘신 주의 시골에서 자전거로 27킬로미터를 돌며 신문 배달을 하던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컴컴한 겨울밤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하 20도의 눈보라에 갇혔습니다. 자전거가 얼음판에서 구르자, 사나운 바람에 신문이 핸들 바구니에서 날아가 얼음과 눈으로 덮인 들판으로 흩어졌습니다. 좌절하고 탈진해서 눈물이 났고, 옷은 얼어서 뻣뻣했습니다. 바람을 피하려고 높이 쌓인 눈 더미의 얼어붙은 표면을 뚫고 눈을 퍼내서 공간을 만들고 그 속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덜덜 떨리던 것이 곧 가라앉고 너무나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지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평화 상태가 찾아왔습니다. 그와 더불어 빛이 퍼져 나가고 무한한 사랑이 존재했습니다. 그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었고 제 자신의 정수와도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곳에 존재하는 이 광명 상태와 저의 자각 상태가 융합하면서 육체와 그 주변도 점차 사라졌습니다. 마음이 입을 닫았습니다. 생각이 완전히 그쳤습니다. 시간과 묘사를 초월해 어떤 무한한 '임재'만이 있거나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벗어난 상태가 있은 뒤에 누간가 제 무릎을 흔들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아버지가 보였습니다. 뭄으로 돌아가거나 몸이 있으면 따르기 마련인 여러 가지 일로 돌아가는 것이 도무지 내키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애절함 때문에 '영'이 몸을 보살펴 다시 움직였습니다. 죽음을 겁내는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죽음이라는 개념이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주관적 경험에 대해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맥락이 닿아야 경험을 설명할 텐데 그럴만한 맥락이 없었습니다. 성자의 삶을 전하는 이야기 외에는 영적 경험에 대해 들어볼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 이후로는 세상의 현실이라 믿던 것들이 그저 얼마 못 갈 것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의 전통적 가르침이 의미를 잃으면서 역설적으로 저는 불가지론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존재를 비추던 신성의 광명에 비교하면 전통 종교의 신은 그 빛이 흐릿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렇게 해서 영서이 종교와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바다에서 기뢰를 제거하는 소해정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다 죽을 뻔한 적도 많았지만 아무런 공포가 없었습니다. 마치 죽음이란 것이 진짜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인 듯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마음의 복잡성에 매료된 저는 정신의학을 배우고자 고학으로 의대에 다녔습니다. 수련 광정을 지도한 정신 분석가는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로, 저와 같은 불가지론자였습니다. 그래서 둘 다 종교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분석 수련은 잘되었고, 직장 생활도 순조로웠으며, 성공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문직 종사자로 안주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치료로도 호전되지 않는 치명적 진행성 질환으로 고통 받게 되었습니다. 38세도 안 돼 죽을 고비에 처했고, 곧 숨을 거두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몸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저의 영혼은 극심한 고통과 절망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래서 저는 기도 속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지금 도와주실 것을 청합니다." 어떤 신이 되었든, 존재할 수도 있는 그 신에 항복하고 저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다시 깨어나자 너무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 있어서, 경외감으로 말문이 막혔습니다.

 

이전까지의 저라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 자아나 에고는 없고 힘이 무한정한 '무한한 임재'만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 '나'였던 것은 이 '임재'로 대체되었고, 육체와 그 움직임은 오로지 '임재'의 '무한한 의지'가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무한히 아름답고 완벽하게 만물로 표출되는 '무한한 일체성'이 명료하게 세상을 비췄습니다.

 

삶이 계속되면서도 이 움짐임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개인적 의지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무한히 강력하면서도 섬세하고 온화한 '임재의 의지'가 인도하는대로 육체는 제 할 일을 바쁘게 해 나갔습니다. 이런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진실이 자명하게 드러나서 아무런 개념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가질 수도 없었습니다. 동시에 몸에서 신경계가 지극히 혹사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애초에 고안된 회로 용량에 비해 훨씬 큰 에너지가 신경계에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효과적으로 제구실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삶의 일상적 동기가 공포나 불안과 함께 모두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기에 추구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명성과 성공, 돈이 무의미했습니다. 친구들은 진료 업무에 복귀하라고 충고했지만, 그렇게 할 일상적 동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개인성 이면의 현실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감정 질환은 나의 개인성이 곧 나라는 신념에서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마치 저절로 그렇게 된 양 진료 업무가 재개되더니, 결국에는 일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환자가 왔습니다. 2000명의 외래 환자를 보자니 50명이 넘는 심리 치료사와 기타 직원, 25개의 진료실, 연구실, 뇌파 실험실이 필요했습니다. 1년에 1000명씩 환자가 늘었습니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도 출연했습니다. 1973년에는 그 동안의 임상 연구를 '분자교정 정신의학'이라는 책에 전통 양식을 빌려 기록했습니다. 이 책은 시대를 10년은 앞선 저작이어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신경계의 전반적 상태가 서서히 나아지더니 다른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감미롭고 기분 좋은 에너지 가닥이 연달아 척추를 타고 올라와 뇌로 들어가면서 거기서 강렬하고 끊임없는 쾌감을 일으켰습니다.

 

만사가 동시 발생적으로 벌어져 완벽하고 조화롭게 전개되었습니다. 기적적인 일이 예사로 일어났습니다. 세상에서 기적이라 부르는 것의 근원은 '임재'였지 개인적 자아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 '나'로 남아 있는 것은 그러한 현상의 목격자일 뿐이었습니다. 이전의 자아나 생각보다 깊고 더욱 큰 '나'가 벌어지는 모든 일을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린 사람들이 역사 속에 있었기에 영적 가르침을 조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부처, 깨달은 현자들, 황벽 선사, 또는 라마나 마하리시나 나사르가다타 마하라지 같은 최근 스승들의 가르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위에 서술한 경험들이 유일무이한 것이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바가바드기타'가 완벽하게 이해됐습니다. 때로는 스리 라마크리슈나나 기독교의 성인들이 전한 것과 똑같은 영적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만물과 만인이 빛을 발하며 지극히 아름다웠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 자체가 '광명'을 내뿜었습니다. 움짐임 없는 상태와 웅장한 아름다움 속에서 그 '광명'을 드러냈습니다. 인류가 모두 내면의 사랑에서 동기를 얻는 것이 사실인데, 다만 자각하지 못하게 된 것이 분명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치 잠이 안 깨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 못하는 사람처럼 삶을 살아갑니다. 주변 사람들이 마치 잠들어 있는 듯이 보였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사람과 사랑에 빠진 듯했습니다.

 

아침과 저녁 식사 전에 한 시간씩 명상 수행을 하던 일상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명상을 하면 지복이 너무나 강해져 때로 삶에서 제구실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눈 더미 속에서 일어난 것과 비슷한 경험이 다시 일어나곤 했고, 그 상태를 벗어나 세상으로 되돌아오기가 갈수록 힘들어 졌습니다. 만물이 그 완벽한 상태 속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답게 빛을 발했고, 세상에서 추하게 보는 곳에도 시간을 벗어난 아름다움만이 존재했습니다. 이 영적 사랑이 지각 전체로 번져 나가 이곳과 저곳 또는 그때와 지금 사이의 모든 경계선이 사라졌습니다. 분리가 사라졌습니다.

 

내면의 침묵 속에서 세월이 가는 동안 '임재'의 강도가 커졌습니다. 삶은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 의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 '나'는 '무한한 임재'의 매개체가 되어 '임재'가 의도한 대로 계속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사람들은 '임재'의 오래 속에서 범상치 않은 평화를 느꼈습니다. 영적 추구자들이 질문에 답해줄 것을 청했지만, 데이비드와 같은 개인은 더 이상 존해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사실 자신의 큰나로부터 심씨 좋게 답을 얻어 내는 셈이었고, 그 큰나는 저의 큰나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일한 큰나가 각자에게서 눈을 통해 빛을 비추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육체적으로 오랫동안 시달린 수많은 고질병이 사라졌습니다. 시력이 저절로 정상으로 돌아와 평생 착용한 이중 초점 안경이 더 이상 필요 없어졌습니다.

 

가끔 강렬한 지복에 찬 에너지 내지 '무한한 사랑'이 어떤 재난 현장을 향해 갑자기 가슴에서 내뿜어지곤 하였습니다. 한 번은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었는데, 그 강렬한 에너지가 가슴에서 방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차가 길이 굽은 곳을 지나자 자동차 사고가 일어난 곳이 나왔습니다. 뒤집힌 차에서 바퀴가 아직도 돌고 있었습니다. 에너지가 대단한 강도로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흘러들더니 제 스스로 멈췄습니다. 또 한 번은 어느 낮선 도시에서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에너지가 앞 블럭 쪽으로 흘러가더니 갱들이 막 싸우기 시작한 현장에 다다랐습니다. 그러자 싸움꾼들이 뒤로 물러나 웃음을 터트렸고 에너지는 도로 멎었습니다.

 

희힌한 상황에서 예고도 없이 지각이 심원한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롱 아일랜드 섬의 로스먼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던 중에 갑자기 '임재'가 강렬해지더니 급기야 보통 때의 지각으로는 분리되어 나타나던 만물과 만인이 시간을 벗어난 보편성과 일체성 속으로 녹아들었습니다. 그 움직이지 않는 '침묵' 속에서 '사건'이나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실제로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지각이 빚어낸 인공물이듯 생사를 거듭하는 분리된 '나'라는 환상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제약받는 가짜 자아가 그 진짜 근원인 보편적 큰나에 녹아들자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절대적 평화와 안도의 상태로 귀향했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모든 고통의 유일한 근원은 개별성의 환상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과 끝없이 영원히 하나임을 깨달을 때 더 이상의 고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에서 환자가 왔고, 일부는 더 이상 절망적일 수 없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많이 진행된 정신병과 불치의 심각한 정신 이상을 치료받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온몸을 비트는 기괴한 사람들이 이동을 위해 둘러싸놓은 시트르 적시며 먼 곳의 병원에서 왔습니다. 일부는 긴장증으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수년간 말을 못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환자들은 각기 그 불구가 된 모습의 이면에 사랑과 아름다움의 정수가 빛나고 있었는데, 평범한 시각으로는 그 빛을 보기 어렵다보니 세상에서 전혀 사랑받지 못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말을 못하는 긴장증 환자가 구속복에 제압된 채 병원으로 이송돼 왔습니다. 심각한 신경 장애가 있어서 서 있지도 못했습니다. 환자는 바닥에서 꿈틀대다 경련을 일으키기 사작했고 소리는 웅얼거렸습니다. 환자는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습니다. 덕분에 다년간 세계 도처에서 수없이 많은 의사와 유명한 전문가들에게 진찰을 받았습니다. 갖은 치료를 다 받아보았지만, 의료계에서는 가망 없는 것으로 보고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비언어적인 질문이 짧게 떠올랐습니다. "신이시여, 이 여성에게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러자 여자는 사랑받을 필요가 있을 뿐이며 그것이면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자 내면의 자아가 눈을 통해 빛났고, 큰나가 그 자애로운 정수와 연결되었습니다. 그 순간 여자는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스스로 알아봄으로써 치유되었습니다. 마음이나 몸에 일어났던 일은 더 이상 여자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 수없이 많은 환자에게 일어났습니다. 통상적 기준으로 볼 때 일부는 회복했고 일부는 회복하지 못했지만, 임상적으로도 회복되었는지는 그 환자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서 분노가 그쳤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내면에서 평화를 느꼈을 때 고통이 그쳤습니다. 이런 현상은 '임재의 연민'에 의해 각 환자의 현실이 새로운 맥락에 놓은 덕에 세상과 세상의 겉모습을 초월한 수준에서 치유를 경험했다는 말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큰나가 주는 평화가 시간과 정체성을 초월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픔과 괴로움은 오직 에고에서 생기며 신에게서 생기는 것이 아님이 분명했습니다. 이 진실이 환자의 마음에 말없이 전해졌습니다. 다년간 말이 없었던 또 다른 긴장증 환자의 경우도 그 점이 정신적 장애물이었습니다. 큰나가 남자에게 마음을 통해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에고가 당신에게 한 일에 대해 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하기 시작했고 이 일을 목격한 간호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일이 갈수록 버거워지더니 결국에는 수습이 되지 않을 정도가 됐습니다. 병원 측에서는 환자를 수용할 병동을 증축하기도 했지만, 병상이 나기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여전히 줄을 이었습니다. 한 번에 한 명의 환자를 보는 것으로 인간의 고통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크나큰 좌절을 느꼈습니다. 마치 바닷물을 퍼내는 일과도 같았습니다. 영적 고뇌와 인간적 고통이 끝없이 쏟아진다는, 이 공통 난제의 원인을 다룰 수 있는 무언가 다른 방법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자극에 대한 신체운동학적 반응(근육 테스트)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정말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근육 반응은 물리적 세계라는 우주와 마음과 영혼의 세계라는 우주 사이의 '윔홀', 즉 다른 차원 간의 인터페이스였습니다. 자신의 근원을 잊고 잠자는 이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상위 현실과의 끊어진 연결을 복구해 모두가 알 수 있게끔 보여줄 수단이 거기에 이르렀습니다. 여러 제자와 조수의 도움을 받아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이때 중대한 발견을 했습니다. 형광등 불빛이나 살충제, 인공 감미료 같은 부정적 자극을 받은 모든 피시험자가 근육 약화 반응을 보였지만, 영적 수련을 함으로써 자각의 수준이 진보한 사람들은 일반 사람들처럼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의식 속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무언가가 바뀌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위둘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믿는 바에만 영향 받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마도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 자체가 질병을 포함해 존재가 겪는 우여곡절에 인간이 저항할 수 있게끔 능력을 키워주는 것임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일을 마음속에 그리는 것만으로 세상일을 바꾸어 놓는 능력이 큰나에게 있었습니다. 사랑이 사랑 아닌 것을 대체할 때마다 사랑에 의해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이런 사랑의 능력을 매우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 집중하면 문명의 체계 전체가 심원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때마다 여갓는 새로운 갈림길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이 같은 중대한 통찰을 세상에 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여줘 반박의 여지가 없도록 입증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엄청난 비극은 언제나, 인간의 정신이 너무 쉽게 기만된다는 점에서 비롯하는 듯했습니다.

 

블화와 갈등은 인류에게 참과 거짓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데 따르는 불가피한 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근본적 딜레마에 대한 답이 있었습니다. 의식의 본성을 새로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다른 방법으로는 추론만 가능한 문제도 풀어서 설명해줄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어떤 일을 위해 뉴욕 생활을 접고 시내의 아파트와 롱아일랜드의 집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저 자신을 도구로 완성해야 했습니다. 그러자면 뉴욕과 그곳의 모든 일을 떠나 작은 마을에서 운둔하는 삶을 살아야 했기에, 그곳에서 이후 7년을 명상과 연구를 하며 지냈습니다.

 

아주 강한 지복의 상태가 구하지 않는데도 되둘아와서 결국에는 '신의 임재' 상태로 있는 채 세상에서 제구실하는 법을 읽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전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마음이 자꾸 놓쳤습니다. 연구와 저술을 하려면 영적 수행을 모두 중단하고 형상의 세계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었습니다. 신문을 읽고 텔레비전을 보면 누가 누구고, 주요 사건으로는 어떤 것이 있으며, 이 시대의 사회적 담론의 본질은 어떤지 등 그동안 놓친 이야기를 따라잡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진실에 대한 비범하고도 주관적인 경험은 집단 무의식에 영적 에너지를 보내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신비가의 소관이지만, 그러한 경험은 인류 중 다수에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어서 영적 추구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지만 그외 사람들에게는 한정된 의미만 있습니다. 그래서 평범해지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것도 그 자체로 '신성'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아의 참모습은 일상생활의 노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보살피고 친절을 베풀며 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흔한 일상과 신은 분간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멀리 한 바퀴 돌아오는 영혼의 여정 끝에 가장 중요한 일로 복귀하였습니다. 그 일은 되도록 많은 동료 존재들이 '임재'를 조금이라도 더 잘 파악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재'는 말없이 평화의 상태를 전달합니다. 평화의 상태는 공간이며, 모든 것이 공간 속에서 공간에 의해 존재와 경험을 갖습니다. '임재'는 한없이 온화하지만 바위처럼 든든하기도 합니다. '임재;와 더불어 모든 공포가 사라집니다. 주용한 수준의 불가해한 황홀경으로서 영적 환희가 일어납니다. 더이상 시간을 경험하지 않으므로 미래를 우려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지난 일로 고통 받거나 다가올 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또한 환희의 근원은 종료되는 일 없이 항상 존재합니다. 시작도 결말도 없기에 상실이나 비탄, 욕망이 없습니다. 아무런 할 일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하고 완전합니다.

 

시간이 멈추면 모든 문제가 사라집니다. 문제란 어느 시점의 지각이 빚어낸 인공물에 불과합니다. '임재'가 세를 이루면 몸이나 마음과 동일시하는 일이 더 이상 없습니다. 마음에 말이 없어짐변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 또한 사라지고 '순수한 자각'이 빛을 발하면서 모든 세상과 모든 우주를 넘어, 시간을 넘어, 시작도 끝도 없이, 나인 그것이자 나였던 그것이고 언제나 나일 그것에 광명을 비춥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러한 자각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인지"를 궁금해 하지만, 그 단계를 밟는 사람은 드뭅니다. 단계가 너무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런 상태에 도달하려는 욕망이 강렬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외 없이 거듭 누구나 용서하고 온화하게 대하는 행동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자아와 생각을 포함해 모든 것에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욕망을 정지시킨 채로 매순간 개인 의지를 항복하려는 자발성이 생겼습니다. 각각의 생각이나 감정, 욕망, 행위를 신계 항복하자 마음은 갈수록 말이 없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이야기와 구절이, 다음에는 발상과 개념이 마음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리져는 바람을 놓아 버리면, 더 이상 생각이 구체화되지 않고 절반도 형성되기 전에 산산히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는 생각 이면의 에너지가 채 생각이 되기도 전에, 에너지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명상 상태에서 한 순간도 주의를 돌리는 일 없이 끊임없고 흔들림 없이 초점을 고정시키는 과제를 일상 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해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힘든 것 같더니, 시간이 가면 습관이 되고 자동적으로 되면서 힘이 점점 덜 들어갔고, 마침내는 하나도 힘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로켓이 지구를 떠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막대한 힘이 필요하다가 지구 중력장을 벗어나면서 힘이 점점 덜 들고, 마침내는 자체의 탄력만으로 우주 공간을 날아가는 것입니다.

 

돌연 예고도 없이 자각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오해의 여지가 없으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임재'가 들어섰습니다. 자아가 죽을 때 잠시 우려하는 순간이 있었고, 이어 '임재'의 절대성에 경외감이 솟구쳤습니다. 이 중대 발견은 실로 극적이었고 이전의 어떤 것보다도 강렬했습니다. 일상의 경험에는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 심원한 충격이 '임재'와 공존하는 사랑에 완화되었습니다. 그 사랑이 지지하고 보호해 주지 않았으면 이 사람은 완전히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에고가 무(無)로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기 존재에 매달리면서 공포에 떠는 순간이 왔습니다. 대신, 에고가 죽으면 에고는 '만유'로서의 큰나, '모두'로 대체되었습니다. 그 '모두' 속에서 모든 것이 인지되며 그 각각의 본질이 완벽하게 표출되어 뚜렷이 드러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함께 나는 존재한적 있거나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전체적이고 완전해 정체성과 성별, 인간이라는 상태조차 넘어서 있습니다. 결코 다시 괴로움과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시점부터는 몸에 일어나는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적 자각이 어떤 수준에 이르면 몸의 병은 치유되거나 저절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절대적 상태 속에서는 그런 점도 고려 사항이 못 됩니다. 몸이 알아서 예견된 경과를 거쳤다가 출밤절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영향 받지 않습니다. 몸이 '나'라기보다 '그것'인 것 같이 됩니다. 물건 같이, 방 안의 가구 같이 됩니다. 그 몸이 개인인 '나'인 양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는 광경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자각 상태를 자각 못하는 이들에게 설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자기 일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섭리'로 하여금 사회 적응을 다루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지복에 도달하면 그 강렬한 황홀경을 감추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눈부셔 하기도 하고, 지복에 수반되는 오라 속에 있고자 도처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영적 추구자들과 영적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중병을 앓아 기적을 구하는 이들을 끌어들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자석이자 환희의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대게 그 지점에서는 모두의 혜택을 위해 그런 상태를 타인과 공유해 활용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 수반되는 황홀경은 처음에는 전적으로 불안정합니다. 크나큰 고통이 따를 때도 있습니다. 가장 극심한 고통이 일어나는 것은 상태가 변동을 거듭하다 뚜렷한 이유 없이 별안간 그칠 때 입니다. 그런 때 '임재'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극심한 절망과 공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런 좌절을 극복하려면 크나큰 의지가 요구됩니다. 이 수준을 초월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심히 괴로운 '은청에서의 하강'으로 거듭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결국에는 명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서로 반대되는 모든 것과 그것들이 상충되게 잡아당기는 것을 넘어설 때까지 이원성을 초월하는 고된 과업을 시작할 때면, 황홀경의 영광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에고의 쇠사슬을 기쁘게 포기하는 것과 황홀한 환희의 금 사슬을 포기하는 것은 아주 별개의 일입니다. 마치 신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전에는 결코 예상 못한 수준의 공포가 생깁니다. 이것이 절대 고둑이 주는 최후의 공포입니다.

 

에고에게 비존재의 공포는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그래서 에고는 그 공포가 다가온다 싶으면 되풀이해서 물러섰습니다. 고통의 목적, 영혼의 어두운 밤의 목적이 이제 명백해졌습니다. 너마누 견디기 힘든 것이라 그 격렬한 고통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극도의 노력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를 자꾸 오가는 일을 참을 수 없게 되면, 존재하려는 욕망 자체를 항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만 마침내 '모두인 상태' 대 무(無), 존재 대 비존재라는 이원성 너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면 수행에서는 이 정점이 가장 힘든 단계, 즉 궁극의 분수령이며, 이 단계에서 사람은 존재의 환상을 초월하고 나면 되돌릴 수가 없음을 완전하게 자각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되돌아올 수가 없으며, 그래서 그 바가역성의 유령 때문에 이 마지막 장애가 모든 선택 중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선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실 이렇게 최종적으로 자아가 종말을 맞이하면서 존재 대 비존재라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원성, 즉 정체성 자체를 해소하는 일은 '보편적 신성' 속으로 낙아서 사라지고, 어떤 선택을 할 개인적 의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때 그 마지막 걸음은 신께서 내닫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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