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맨 2020.06.0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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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하는 편의점의 열쇠와 보안 카드가 2주일에 걸쳐 하나씩 사라졌다.

전 주에는 열쇠를, 이번 주에는 보안 카드를 분실한 것이다.

 

 

나는 주말 오후부터 새벽 마감까지 근무하기에 점장님을 마주칠 일이 없었는데, 이번 분실의 계기로 점장님을 약 3개월 만에 만나게 된 것이다.

 

 

점장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12시나 1시쯤에 갈 테니깐.”

. 점장님.”

 

 

나는 전화를 끊고 현재의 시간을 확인했다. 1140.

12시 정각에 올 확률은 희박해. 아마도 12시 반에서 1시 사이쯤 오실 테지.’

 

 

나는 읽고 있던 양을 둘러싼 모험을 마저 읽으려 했지만, 곧 점장님이 오신다는 생각이 엄습해 불안과 초조함을 느끼다 결국 책을 덮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예정 시간보다 좀 더 빨리 청소를 시작해야만 할 것 같아.’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바닥을 쓸고 대걸레질을 했다. 컵라면이 빈 진열장을 새로운 컵라면으로 채워놓고 음료수 전면에 프린트된 상표가 앞을 보이게끔 돌려놓고 진열된 우유갑을 테트리스처럼 반듯하게 다시 정렬했더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아 참. 과자를 안 채워 놓았네.

 

 

과자를 채우려는데 점장님이 마스크를 쓴 채 6월 행사 상품 스티커 패널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점장님은 과자를 채우고 있는 나를 보고선 말했다.

하던 거, 마저 해.”

. 점장님.”

 

 

나는 생각했다.

청소를 일찍 시작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어.’

나는 나를 다독이며 과자를 채웠다.

 

 

시간은 흘러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점장님은 내게 말했다.

 

 

차 가지고 올 테니깐. 잠깐 기다려.”

. 저는 삼십 분이면 집에 도착합니다. 걸어가겠습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깐. 집이 동대문이라고 했지?”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로 이화사거리 아시나요? 아니면 낙산? 이화동? 충신동?”

집이 동대문이 아니야?”

동대문이랑 가깝기는 하지만 동대문은 아닙니다.”

그렇구나. 이화사거리는 아니깐 거기서 다시 말해줄래?”

. 점장님.”

 

 

점장님의 차는 은색 싼타페거나 그 비슷한 차종이었다.

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상급자가 운전할 시 뒷자리에 타는 것은 상급자에 대한 결례라고 익히 들어온바

점장님이 운전석에 타실 때와 타이밍을 맞추어 앞 좌석에 탑승했다.

 

 

개인의 승용차에 타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별안간 안정된 사회의 결속된 충만한 소속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우리를 태운 차는 이화사거리로 가는 도중 신호에 걸려 우두커니 멈춰 섰다새벽시간이라지만 이상하게도 주위에는 단 한 대의 차도 지나가지 않았다. 먹물 같은 검은 하늘과 신호등 빛에 번들거리는 아스팔트 사이에 점장님과 나, 단둘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갑자기 점장님이 말했다.

아까 마감 전에 라이터 남자 또 왔던데.”

 

 

점장님의 스피드 퀴즈 같은 말에 내 머리는 몇 초간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생각해냈다.

. 하루에 세네 번씩 오면서 라이터 사가는 손님 말이죠?”

 

 

내가 지금의 편의점을 리모델링한 후부터 맡았는데,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이야. 그때부터 왔었어. 아마 그 사람 집에 라이터가 몇만 개는 있을 거야.”

 

 

저도 점장님 밑에서 일한 지 2-3년 정도 됐는데, 그동안 제가 근무하는 주말만 해도 하루에 세네 번씩은 꼭 오셔서 라이터를 사가시더라고요. 제가 추측하기론 근처에 사시는 분이 아닐까 하는데요.”

 

 

아마 뒤쪽에 효성 주얼리시티에 살 거야.”

 

 

저는 혹시나 라이터 수집하시는 분일 까봐서 되도록이면 라이터 색상을 매번 다른 것으로 드리거든요.”

 

 

점장님이 허허허 웃으셨다.

 

 

이윽고 차는 이화사거리를 지나 이화동으로 향하는 신호등 앞에서 멈췄다.

 

 

여기서 내려 주시면 됩니다.”

나는 또 동대문 저쪽인 줄 알고. 오늘 수고했다.”

.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점장님과 나, 우리들만의 비밀이야기가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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