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경찰서 가는 길

by 그림자맨 posted May 05, 2020

K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 엶은 위엄이 서린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말해.”

  

나는 술을 한 잔 마셨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어.”

  

K의 낯빛에는 주저하는 표정이 가시지 않았지만, 곧 포기한 듯 비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달 전이었어. 일산의 S형 알지? 그 형하고 일산에서 술을 마셨지. 1차를 끝내고 딱히 갈 곳도 없어서 토크 바에 가기로 했다. 입구에 ‘La Seine’라고 이탤릭체로 새겨진 간판이 제법 세련되고 멋져 보였어. 새벽 1시쯤이었는데 12층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 야경이 정말 끝내줬지. 바 분위기도 나름 괜찮았고 여자들도 귀여웠다. 옆에 앉은 여자가 무척 예뻐서 기나긴 고독에 지친 내 육체가 녹은 초콜릿처럼 살살 흘러내렸어.”

 

나는 맛없는 빨간 콩나물국에 숟가락을 넣어 휘휘 저었다.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듣고 있는 거야?”

  

나는 숟가락을 계속 휘저으며 말했다.

  

“듣고 있고말고.”

  

그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그런데 옆에 앉은 여자가 뜬금없이 핸드폰 번호를 알려 달라는 거야. 나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지. 여자가 말했어. ‘우리 연락하며 지내요.’ 나는 말했지. ‘그래도 돼요?’ 여자가 뱀이 똬리를 틀듯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웃더라고.”

  

나는 이제야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형. 미쳤어? 연락해서 뭐 하려고? 설마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있는 거야?”

  

K는 술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대답했다.

  

“응. 연락하고 있었어. 한 3주 전부터였지. 카카오톡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나는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카톡 줘봐. 한 번 봐보게.”

  

대화 내용을 살펴보고 있자니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카톡 대화창에 쓰여있던 것은 ‘전형적인 세속적 썸 타기’가 주를 이루었다. 나는 술집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는 척하며 스치듯 그의 얼굴을 보았다. K는 살짝 웃으며 낯을 붉혔다.

 

나는 그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이름이 홍채린이네? 이름에서 무언가 불길한 징조가 느껴지는데?”

  

K는 핸드폰을 갈색 오버코트 주머니에 집어넣고서는 내게 맹세를 강요했다.

  

“정말로 아무 한 테도 말하지 마! 맹세해.”

  

나는 점점 조급해졌다.

  

“맹세는 안 하지만 말 안 할게. 빨리 말해봐. 홍채린하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토크바 이후로 또 만난 적이 있어? 번호교환을 도대체 왜 한 거야? 어떤 비열한 속셈이 있는 거 아냐? 형의 내면을 잘 한번 살펴봐. 잠깐만, 설마 토크바 이후에 따로 만난 적이 있지?”

  

K는 억울한 듯 고개를 저었다.

  

“2주 전쯤에 영화 보기로 약속했거든. 그래서 예매까지 했었는데 만나지는 않았어.”

  

나는 스스로가 점점 흥분하고 있음을 느끼며 말했다.

  

“예매까지 했는데 무슨 수로 못 만나게 되는 거야?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만난 거잖아?”

  

K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야. 영화 보기로 한 날 아침이었지. 별안간 내 안의 위험 감지 시스템에서 긴급 중지 명령을 내렸어. 나는 생각했지. ‘오늘 나갔다간 골로 가겠구나.’”  

 

나는 그에게 두 번째로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핸드폰 줘봐. 다시 살펴봐야겠어.”

  

K는 갈색 오버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다시 꺼내 건네주고선 술을 한 잔 마셨다.

  

핸드폰을 건네받은 나는 막상 넌더리나는 대화들을 또다시 살펴보려고 하니 정신이 아찔해지며 마음이 꺼림칙해졌다. 감전된 듯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오싹해졌다. 수백 마리의 박쥐가 매달려있는 어두운 동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내 목덜미에 이십 킬로의 돌덩이가 매달려 있는 듯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가며 대화 내용을 괴로운 심정으로 살펴보았다.

  

이것은 2주 전, K(회원님)와 홍채린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의 일부이다.

 

홍채린 : 이제인났어.ㅜㅜ

회원님 : 우짜 일늦겠다 ㅜ

회원님 : 근데 우리 내일 만나기로 한거 다음에 봐도 될까급하게 끝내야될 일이 들어왔어

회원님 : ㅜㅜ

홍채린 : 웅그래

회원님 : 응 미안 미안 

나는 다시 그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사실이로군. 내 생각으로는 이상한 여자가 거의 확실한 것 같아. 그런데 궁금한 게 왜 미리 예매를 했지? 당일에 바로 극장 가서 표를 끊어도 되지 않았을까? 오랜만에 데이트 할생각에 기뻐 들떠서 요리조리 미리 예매까지 한 거지? 그러니까 괜히 푯값만 날렸지 않아? 그래서 겨우 이따위 해프닝 가지고 그렇게 뜸을 들인 거야?”

  

K는 세 번째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어. 푯값은 환불도 받았다구.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보다 더 큰 일이야.”

  

나는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럼 어서 본론을 말하라고!”

  

K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힘겹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일주일 전이었어. 새벽 1시쯤이었지. 나는 누워서 담배를 한 대 피고 있었는데 홍채린에게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어. 급해서 그런데 혹시 10만 원을 계좌로 보내줄 수 있겠냐는 거야.”

 

나는 조금전까지 그와 홍채린이 나눈 카톡대화를 나름 꼼꼼히 조사해보았지만, 10만원에 관한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기에, 놀라움을 느끼며 마지막 퀴즈의 정답을 맞힌 우승자처럼 소리쳤다.

  

“그럴 줄 알았어! 나는 그럴 줄 알았다고! 당연히 빌려줬겠지? 그렇지?”

  

K는 무표정한 얼굴로 술을 한 잔 마셨다. 곧 그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응급실에 가야 한다는데 그럼 어쩌겠냐. 안 빌려줄래야 안 빌려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덫에 걸려 몹시 발버둥 치는 쥐가 떠올랐다.

  

“그걸 믿었어? 그걸 믿은 거야? 도대체 그따위 뻔한 수작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어?”

  

K는 흥분하며 소리쳤다.

“응급실! 응급실이라고 했잖아!”

  

나는 술을 한 잔 마셨다. 이번 잔은 조금 썼다.

K 또한 술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는 갑자기 차분해진 말투로 아픈 기억을 계속 더듬어나갔다.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지. 그런데 계좌 소유자의 이름이 박보성인 거야. 그래서 물어봤어. 받는 사람 이름이 다르다 어떻게 된 일이냐. 그녀가 말했어. ‘아버지 계좌야. 오빠.’ 계좌이체를 한 후 30분 뒤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어.”

  

나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말했다.

  

“아버지 성씨가 박 씨일 리가 없지...”

  

K는 이제야 비로소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째 돈을 안 갚고 있어. 나도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내일까지 갚지 않는다면 사기죄로 고소할 거야. 미리 좀 알아봤는데, 의정부 경찰서에 민원센터가 있어. 거기서 고소장을 써야 하는데 나 혼자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혹시 같이 가 줄 수 있니? 형이 이렇게 부탁한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

  

“같이 가줄 게 형.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도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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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이불 속에 파묻혀 바흐의 플루트 소나타 E 단조를 듣고 있었다.

반쯤 열어둔 창문에서 오전의 적막하고 투명한 기운이 내게로 흘러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역시 E 단조야.”

 

E 단조는 내게 숨겨져 있는 세계에 대한 리얼리티를 전해준다.

이제 막 녹기 시작한 커다란 초록색 젤리 속에 잠기듯, 나를 고요한 안개 숲으로 깊숙이 가라앉게 한다. 

그렇게 한동안 안개가 흐르는 숲속을 거닐고 있을 때 K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이야. 일주일의 기한을 주었지만, 예상했듯이 돈을 갚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고 카카오톡도 묵묵부답이야. 진정, 고소해야지 어쩔 수가 없다.”

 

“정말 도덕적으로 타락한 여자로군.” 나는 말했다.

 

“그래서, 오늘 나 좀 도와주었으면 해. 시간 괜찮지?” K가 물었다.

 

“그래. 아무 일도 없어.” 나는 대답했다.

 

“그럼 지금이 11시쯤이니까 12시 반까지 의정부역에서 만나자.” K가 말했다.

 

“알았어.” 나는 말했다.

 


 

나는 의정부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K의 고소에 관해 생각했다.

 

'이런 경우에 형사고소가 가능할까? 민사소송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야,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핵심은 피해 금액 십만 원으로 과연 형사고소가 가능할지가 관건이다. 고소장이야 쓸 수는 있겠지. 아마 K는 형사고소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형사고소를 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빈약하다. 아니, 애초에 이 사건을 사기죄로 다룰 수 있을까? 아니라면 민사소송으로 갈 것인가? K가 소송 비용을 감당 할 수 있을까? 고작 빼앗긴 십 만원 때문에 민사소송을 걸다니. 우스운 코미디이다. 너무나 부조리하구나.'

 

상계역을 지나고 있는 지하철 창밖으로 택시 영업소가 눈에 들어왔다.

주황색의 택시들이 가지런하게 일렬로 주차되어 있었다.

택시들은 정오의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이어서 생각했다.

 

“우선은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적 근거가 필요할 거야. 홍채린이 돈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의 정황에 대한 사실 증거가 필요해. K의 카카오톡 대화내용을 다시 살펴봐야겠어. 응급실 빌미를 기준점으로 잡고서 앞뒤 대화내용과 함께 증거자료로 프린트하면 승산이 있겠군.”

 

지하철은 꾸준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의정부역에 도착했다.

역 앞 양배추꽃이 자라고 있는 커다란 직사각형의 화분 옆에서 K가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발견하고선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그를 주시하며 다가갔다.

절반 쯤 다가가니 그가 나를 알아차리며 소리쳤다.

 

“십 분 늦었잖아!”

 

나는 그의 불만을 무마시키려 엄숙한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처럼 물었다.

“잠깐만. 궁금한 것이 있는데 형사고소를 할 생각이야?”

 

K는 담배를 마저 피우고서 내게 말했다.

“그럴 생각이야. 사기죄로.”

 

나는 말했다.

“사기죄라면 증거가 있어야 할 텐데.”

 

K는 말했다.

“증거? 그렇지. 증거가 있어야지.”

 

나는 말했다.

“내 생각엔 당시 홍채린과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프린트해서 고소장 쓸 때 같이 제출하면 효과적이지 않을까?”

 

K는 말했다.

“맞아.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럼 PC방부터 가야겠다.”

 

나는 의정부역 앞 사거리 왼쪽 건물에 붙어있는 PC방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네.”

 


 

때마침 사거리에서 신호등의 색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K와 나는 종종걸음으로 사거리를 건너서 PC방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PC방은 2층이었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PC방 입구에 세워져 있는 POP 메뉴에 컬러 프린트 장당 천 원, 흑백 프린트 장당 이백 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K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PC용 카카오톡에 로그인 했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너무 편안했다.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니터에 비친 K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는 집중하고 있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흘러갔다. K가 갑자기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K가 물었다. “프린트 되고 있나요?”

“네. 잘 되고 있습니다.” 남성 아르바이트생이 대답했다.

 

K는 다시 돌아왔다. 나는 편안한 의자에 깊숙이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K가 말했다. “이제 곧 끝나. 어서 일어나.”

나는 말했다. “너무 편안하다.”

 

K는 바로 조금 전에 앉았음에도 다시 의자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향했다.

 

K가 물었다 “다 뽑혔나요?”

“글쎄요. 아직 한 장이 남아 있는 거 같은데.” 아르바이트생이 카운터에 있는 프린터기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다 나왔다.” K가 프린터기에서 나오는 마지막 장을 보며 말했다.

“얼마에요?”

아르바이트생은 프린터기에서 나온 출력물을 한 장씩 세어 보았다.

“컬러로 프린트를 하셨네요. 총 아홉 장, 해서 9000원입니다.”

 

K는 절망적으로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체크카드를 꺼냈다.

“카드 되지요?”

 

나는 무언가 불쾌감과 비슷한 어떤 심리적 압박을 느끼며 의자에서 일어나 K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컬러로 프린트를 했네.” 

“그럼 돈이 훨씬 많이 들잖아?”

“그러니깐.”

 

PC방에서 나온 K와 나는 건물 입구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너 때문이잖아!” K가 소리쳤다. 

나는 프린트 값 9000원을 계속해서 생각하다 말했다.

“왜 나 때문이야?” 

“네가 잘 알려줬어야지. 괜히 컬러로 뽑아서 돈만 낭비했네. 씨팔!”

“마음이 괴롭겠다. 형.” 내가 말했다.

“괴롭다. 괴로워." K가 말했다.

 


 

K와 나는 사거리 횡당보도에서 ‘의정부 경찰서 300m 앞’이라고 쓰여 있는 도로 안내 표지판을 보았다. 우리는 표지판에 그려진 화살표 방향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철도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의 지하 통로를 통과했다. 시멘트벽에 누군가가 적색 1호 래커로 ‘공고짱’이라고 칠해놓았다. 지하 통로를 빠져 나오고 10m쯤 걸어 나가자 오른쪽 펜스 너머 을씨년스러운 의정부 경찰서의 거대한 건물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K와 나는 의정부 경찰서의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정문에서 바라본 경찰서 건물 중앙 꼭대기에는 퇴폐한 미래도시에나 있을법한 원통형의 거대한 납빛 기둥이 연푸른빛의 하늘을 등지고 고고하게 세워져 있었다. 기둥 표면에 부착된 안테나 주위를 여러 마리의 까마귀들이 수면에 검은 기름이 떠 있듯 맴돌았다.  

 

K와 나는 경찰서 건물 오른쪽에 위치한 ‘통합민원실’로 들어갔다.

민원실의 로비에는 직사각형의 대형 거울이 정면에 놓여있었다. 거울 앞에는 원형의 테이블 위에 줄이 달린 색색의 볼펜들이 꽂혀 있었고, 여러 종류의 고소장 서식이 모래층처럼 겹겹이 쌓여있었다. 우리는 통합민원실의 로비를 지나 접수처로 보이는 실내의 문을 열었는데, 안은 무향실에 들어와 있는 듯,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우리는 회색 카펫이 깔린 접수처 중앙에서 두리번거리며 가만히 서 있었다. 15초 후 접수처 안쪽에서 형광조끼를 입은 경찰이 의자에서 일어나 말했다.  

 

“식사는 하고 오셨어요?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식사를 하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경찰서 정문 밖으로 다시 나갔다. 지금 이곳에서부터 전방 100미터 끝, 대각선 방향으로 횡단보도 건너에 대문짝만한 설렁탕 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K가 말했다.

“설렁탕이나 먹자.”

“응!” 

 

식당 입구 왼편에는 맵시 있게 잘빠진 샛노란 람보르기니가 주차되어 있었다.  

 

조선옥 설농탕은 비록 체인점이긴 했지만, 나는 주인의 눈빛에서 집요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설렁탕에 대한 철두철미한 장인정신, 이 식당 고유의 깊고 진한 육수를 창조해내기 위해 거듭된 시행착오의 나날들과 그로 인한 고뇌, 수천 번이나 벼려진 쇠와 같은 열정이 깃든 그의 첨예한 정신을 순간 단편적으로나마 읽어 낼 수 있었다.

 

자리에 앉자 K는 설렁탕 두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K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고, 나는 테이블에 턱을 괴며 말했다.

"경찰서에 오게 되니깐 설렁탕을 먹게 되는 구나. 참으로 신기한 일이야."

 

나는 설렁탕 보다 먼저 나온 소주를 K에게 한 잔 따라 주었다.  K는 소주를 마셨다. 나도 소주를 한 잔 마시고 깍두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설렁탕 두 그릇이 테이블에 놓였다. 활화산이 폭발하는 듯 뚝배기에서 우윳빛 액체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신중하게 한 입 떠먹어보니 과연 국물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K와 나는 다시 의정부 경찰서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접수처는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북적하고 있었다.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세상에는 이처럼 고소할 일들이 넘쳐나는구나.”

 

 K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열에 들 뜬 듯 말했다.  

“죄악의 세상이야. 이젠 십 만원이 문제가 아니야. 홍채린에게 사법시스템의 무서움을 보여 줄 거야. 사기를 치면 어떻게 되는지!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능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처절하게 후회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앳된 얼굴의 한 공익공무 요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나는 그의 말투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K가 말했다.

“고소장 접수하려고요.”  

“그럼 번호표 뽑으시고 잠시 기다리세요.”  

 

우리는 십 분여 가량 접수처와 민원실 로비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마침내 우리 번호표의 번호가 접수처 전광판에 깜빡거렸다. 우리는 공익요원의 안내를 받아 접수처 우측에 위치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어서자 50대 중반의 남자가 컴퓨터 책상 위로 두 손을 깍지를 끼고 그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선 침울하게 말했다. 그의 팔꿈치는 접착제로 책상에 붙여 있는 듯 했다.  

“자, 앉으세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컴퓨터 책상 앞에 마련되어 있는 회색 철제 의자에 앉았다.

K가 말했다. “사기를 당해서 고소를 할 생각입니다.”

 

“어떤 사기이지요? 금액사기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피해금액이 어떻게 되십니까?” 

“십 만원입니다."

  

조사담당자가 잠시 멈칫하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팔꿈치가 접착제로 붙여 있는 것은 아니었군. 이 틈을 타 나는 말했다.

 

“증거 서류를 가지고 왔습니다.”

조사담당자가 말했다. “어디 봅시다.” 

 

나는 벽의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K의 허벅다리를 내 허벅다리로 밀쳤다. K는 엉거주춤 일어나 프린트 한 증거자료를 조사담당자에게 건네주고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사담당자가 증거 서류를 훑어보는 시간은 20초 남짓이었다.

 

“이것으로는 사기죄가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조사담당자는 조금 전과는 대조적으로 전문가다운 열성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 서류에는 구체적인 피해가 명시되어 있지 않군요. 또한 사기죄라고 인정할 만한 사실이 드러나 있지 않고요. 정황만으로는 사기죄의 성립요건을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애정관계로서 금액 10만원을 자의로 송금한 것처럼 보여 지기까지 하는군요.”  

 

“응급실 간다고 거짓말 친거라구요!” 

K가 흥분하여 외쳤다.

“침착해.” 나는 말렸다.  

 

“고소장 접수는 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그렇지만 내용 검토 단계에서 각하될 것입니다. 접수는 하실 수 있어요. 그건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접수를 하셔도 되지만 어쨌든 각하 될 것입니다.”  

 

“접수라도 해볼까?” 

망연자실해 있는 K에게 물었다.

 

조사담당자가 말했다.

“하셔도 됩니다.”

 

“하자.” 

K가 내게 말했다. 

 

조사담당자 사무실에서 나온 우리는 통합민원실의 로비로 걸어갔다. K는 원형 유리 테이블위에서 고소장을 작성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고소인 : K

  주민등록번호 : XXXXX

  주소 : XXXX

  연락처 : XXXX  

  피고소인 : 홍채린

  주민등록번호 : XXXXXX

  주소 : XXXX

  연락처 : XXXX  

  고소사실 : 

  (육하원칙으로 피해사실 기재) “2020년 X월 XX일 우리은행 계좌이체로   피고소인이 병원 응급실에 가야 한다고 하면서 10만원을 빌려가서 현재까지 갚고 있지 앉아 사기죄로 고소합니다.”

 

고소장이 완성되자 나는 극심한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접수해봤자 휴지 조각되는 것이 뻔한데, 만약 이것을 접수 한다면 국가 인력낭비가 아닌가!”

 

나는 고소장을 손에 들고서 K에게 말했다.

“형. 접수해봤자 소용없을 텐데, 어떻게 할 거야? 접수 할 거야?”

 

K는 말했다.

“하지말까?”

 

나는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접수는 하지 말고서 고소장을 홍채린한테 카톡으로 보내. 겁이라도 주게.”  

 

K는 그 자리에서 고소장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홍채린에게 보냈다. 

그리고 덧붙였다. 

 

“고소했다.” 

 

돌아오는 길에 K는 갑자기 오줌이 마렵다며 ‘공고짱’이라고 칠해진 지하통로 시멘트벽에 오줌을 누었다. 나는 오줌을 누는 K의 뒷모습을 몸으로 가리며 햇빛이 잘라진 통로 끝에서부터 걸어오는 잿빛머리카락의 여자를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Comment '5'
  • 안채호 2020.05.06 01:33

    K도 비싼 수업료를 치루고는 깨달았겠지요.
    "잘 모르는 사람한테는 돈 빌려주지 말자!"

  • 비선형 2020.05.17 17:38
    "고소했다"
  • 오줌보 2020.05.21 14:09

    홍채린의 본명은 박선자이다. 아버지는 K가 보냈던 계좌의 박보상이 맞다. 홍채린은 그 날 발가락 부상으로 실제 응급실에 간 것이 맞으며, 돈을 갚으려고 했으나, 갑자기 그만둔 토크방에서 월급을 빨리 정산해 주지 않아 갚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K가 '고소했다'는 카톡을 받고선 신의를 잃어, '에라이! 썅! 맘대로 해라!' 마음 먹고는 갚지 않기로 하였다. 토크방을 관둔 홍채린은 외숙모의 도움으로 일루미아티 용인 갑 지부에서 회계 일을 맡게 되었으며, K에게 '광명회에네르기파동권(이하 광명파)'을 먹이려 한다. K는 일주일간 장미목으로 만든 자신을 본 딴 목각인형을 안방 침대에 눕혀놓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모시천으로 감싸 인형의 머리맡에 두어야 한다. K 자신은 근처 여인숙에서 열흘간 몸을 피하면 '광명파'를 벗어날 수 있다. 그리 않는다면, 머리털이 왕창 빠지고 쉽게 피로하며 입맛을 잃게 된다. 현재 홍채린은 '광명파'을 일으키기 위한 고급단계를 수련 중이다. K는 서둘러야 한다. 장미목 인형은 전북 정읍 읍내에서 장미목 가구상을 하는 정성만 선생을 찾아가면 제작해 준다. 가격은 디테일에 따라 140~6000만원 정도로 천차만별이며, 액막이용으로 쓸거니 팔다리 이목구비만 얼추 갖취달라 청하면 250만원 안짝이면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줌보의 소개로 왔다는 말하면 잘해줄 것이다.) 다소 비싸긴 하지만 '광명파'를 맞는 거 보단 백만배나 낫다는 말씀!

  • 요들송 2020.06.17 15:31 Files첨부 (1)

    영자(影子)씨, 너무하오. 솔직히 많이 지나치시오.
    의정부동에 있는 ‘조선옥 설농탕’이 체인점이 아니라굽쇼?

    ‘조선옥 설농탕’은 물론이거니와
    2층에 간판이 달린 ‘원조 남원 추어탕’ 역시 체인점이여.
    추어탕만 팔기가 아쉬워 ‘조선옥 설농탕’ 체인점과 합쳤소.
    즉, 그곳은 '아햏햏'하게도 무려 이중 체인점인 것이요.

    간판에 버젓이 '의정부점'이라고 써있는 걸 못 보셨소?
    ‘가짜뉴스’ 퍼트리다간 고 작은코 마저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조선옥.jpg

  • 그림자맨 2020.06.18 01:25
    수정하였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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