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멜로] 조금 더 가까이 1

by 안채호 posted Mar 0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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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가 식탁 위에 오만원을 놓고갔다. 어젯밤 엔이 피우는 담배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엔이 냉장고와 주방을 둘러보니 먹을만한 게 전혀 없었다. 오만원이 있어봤자 담배 한보루를 사만천원 주고 사고나면 구천원 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변변찮은 음식도 사다먹을 형편이 못된다. 남은 돈으로 술을 사야하기 때문이다. 엔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견디기 힘들다. 

 

엔은 몇 일 전에 식자재마트에서 산 업소용 대형 참치 통조림을 떠올렸다. 처음 보는 메이커라 의심스러웠지만 값이 싸서 샀더니 너무 짜서 그냥 먹기가 곤란했다. 하지만 체에 받쳐 물로 씻어낸 다음 신김치랑 볶으면 그럭저럭 먹을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에스는 엔이 술에 취하는 것을 싫어했다. 어쩌다 필름이 끊겨 속엣말이 나오기라도 하면 대놓고 경멸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소주 대신에 맥주나 국산 싸구려 청주, 아니면 막걸리 같은 걸 마시라고 한다. 그러나 엔은 맥주와 막걸리는 배가 불러 오래 마시질 못하고 청주는 입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에스와 함께 대형마트에 가서 저가의 캘리포니아 화이트를 한꺼번에 사서오곤 했다.

 

하지만 어제 떨어진 것은 담배만이 아니었다. 술도 바닥이 난 것이다. 오만원으로 담배 한보루를 사고 나면 와인을 한 병 밖에 사지 못한다. 물론 한 병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그 먼 대형마트까지 갈 엄두도 도저히 안났다. 오늘은 소주다. 엔은 결심했다. 창 밖은 비라도 올 것 처럼 어둡고 우중충했는데, 하늘 저편 시퍼런 구름 아래로 밝은 빛이 신비롭게 감돌고 있는 광경을 보니, 영문 모르게도 엔의 가슴 어딘가에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참치김치볶음에는 소주가 제일 어울린다.

 

다행인 것은, 에스가 엔이 술을 먹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인데, 엔은 그것이 자신의 조루증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엔은 술에 적당히 취해 있으면 둔감해져서 조루증이 완화되곤 하는데, 실제로 에스는 엔이 술에 적당히 취해 있을때에만 성교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치면 지루증으로 전도될 수 있기 때문에 너무 취해서도 안된다. 혈중 알콜량을 조절하여 조루와 지루 사이의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유지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지갑을 찾았다. 식탁 아래 개사료를 모아둔 곳에 떨어져있었다. 엔도 지갑 쯤은 갖고 있다. 식탁 위의 있던 오만원을 지갑에 넣었다. 현관에서 거울을통해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수염이 그리 많이 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의 이방이 길렀을 입술 옆의 수염만 깍아냈다. 백수로 보이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낮에는 외출을 꺼리는 편이지만, 오늘은 술도 담배도 떨어졌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었다. 밖에서 일을 하다가 들어가는 사람처럼 보여지기 위해 노트북 가방을 집어 들었다. 노트북은 에스가 가져가 가방은 비어있었지만, 거울을 들여다보니 제법 프리랜서 같아 보였다. 그냥 빈가방만 들고 가기는 어색해서 바닥에 구르던 책을 한권 집어 넣었다. 신화의 힘.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 

 

엔은 언제나 도서관에서 아무 책이나 빌려다 놓기만 하고 거의 한 줄도 읽지 않는다. 사람들이 빌렸다가 막 반납하여 서가에 꽃히지 않은 반남합에 있는 책들을 골라 잡는다. 그렇게라도 동시대의 사람들과 어떤 기운이라도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엔에게 도서관은 사람을 대면하지 않고도 사람답게 무언가를 거래하는 듯한 행위를 할 수 있한 소중한 시단이다. 반년전에 화가나서 컴퓨터를 박살낸 이후로는 인터넷조차 할 수 없었다.

 

깜빡하고 슬리퍼를 신으려다 운동화로 고쳐 신었다. 신경안정제도 떨어졌기 때문에 덜렁대지 않도록 보다 조심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잠이 오지 않아 신경안정제를 몇알씩 더 먹었던 지난밤들이 후회됐다. 병원에 가려면 아직 이틀이 남았다. 이틀 후에는 한 달에 두 번씩 치뤄야 하는 예약된 전쟁이 있다.

 

엔은 병원에 자주 오는 것이 힘들고 부담되니, 약을 한달치를 달라고 사정해도 의사는 2주치 밖에 주지 않는다. 한 번에 몰아먹고 자살이라도 할까 봐 염려하는 것 같아, 하려면 진작에 했지, 새삼 이제와 할리가 없다고 호소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잦은 진료에 비용이 부담스러워서 그렇다고 해보니, 진료 상담비는 받지 않고 약값만 받겠다고 했다. 인정이 있는 의사이다. 

 

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는 현관문에 손을 댔다. 삐꺼덕 소리가 들리지 않게,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돌려 열었으나, 문 앞에 놔둔 택배 박스가 계단 밑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엔은 놀라 얼른 문을 닫았다가, 밑에 집에 사람의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긴장하지 말자! 그러나 방심하지도 말자!” 

 

아랫층 부부는 맞벌이라서 지금 시간에 집에 있을리 없지만, 혹시 내장 어딘가가 아파서 조퇴라도 했을지 모를 일이다. 주변 소리에 주의를 기울이며 택배 상자를 보니 강아지 캔사료다. 강아지는 집을 나간지 벌써 3주가 되었는데도 에스는 기여코 강아지가 좋아하던 캔사료를 산 모양이다. 평소에는 잘 사주지도 않았으면서, 이런다고 해서 집을 나간 강아지가 돌아올 것인가. 

 

일이년 전에 에스가 누군가에게 얻어왔던 그 개는 분명히 착했다. 그런데 여느 개처럼 사람을 잘 따르지 않았다. 에스가 상상하던 개가 아니었다. 이따금 엔이 한 낮에 술을 마시고 있을때야 고양이 처럼 다가와 잠시 몸을 부볐다. 그러던 개가 어느날 아무 이유도 없이 제발로 나가버렸다. 그가 여겨지는 진짜 주인을 찾으러 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엔은 강아지 사료가 담긴 택배 박스를 현관문 안에 밀어 넣고는 문을 닫았다. 잠그지는 않는다. 유사시에 집에 빨리 들어오려면 열쇠로 문은 따는 과정을 축소해야한다. 

 

문을 닫는 찰리에 보았다. 엔은 택배의 수취인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말라고 항상 말하는대도, 에스는 무심하게 또 엔의 이름을 썼다. 엔은 뻐근한 무릎의 통증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계단 손잡이를 잡고 내려오면서, 택배 박스에 적혀있던 ‘남성기'라는 저주스러운 세글자를 떠올렸다.  

 

엔의 학창시절 별명은 말할 것도 없이 ‘자지' 였다. 이후 ‘남자지'로 조금 순화되다가 고등학교땐 주로 ‘페니스'라고 불려졌다., 일부에서는 ‘남근'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엔은 ‘남근'이라는 별명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밖에서 누가 들을 때 ‘김남근’이나 ‘박남근' 처럼 자칫 평범한 이름인 것 처럼 오인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좆'이라고도 많이 불렸다. 

 

엔은 자신의 성이 달라 남성기가 아니라 남궁성기이기만 했어도, 오늘 날 이처럼 위축된 인격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찬물에 들어갈때 처럼 조심스럽게 건물을 빠져나왔다. 엔은 5층 빌라건물의 5층에 살고 있다. 옆 건물의 부동산 아줌마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행인인 양, 일부러 멀리 떨어져 걸으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식물처럼 햇빛이라도 주려는 냥, 아줌마는 낮에는 부동산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그러나 비가 조금씩 내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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