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도이칠란드인의 비망록2

by 안채호 posted Aug 20, 2018

경석의 글은 애매하게 거기서 끝이 났다. 나는 크고 작은 의문점이 생겨났다. 첫번째 작은 의문점은 아세르왓은 과연 가지어트에게서 숲의 오솔길을 개척하는데 성공할 것인가의 여부이고, 두번째 큰 의문점은 경석이는 어째서 이런 글을 색을 입힌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정성스럽게 쓰고 있냐는 것이었다.

 

즉시 경석에게 가서 물었다. 그러자 경석이 말했다.

 

“답변 해줄 수가 없어. 아직 결정내리지 못했거든. 뛰어난 협상가인 아레스왓의 언변의 창과, 강고한 수구주의자인 가지어트의 방패, 둘 중에 무엇이 이길지, 나 역시 고민 중이야.”

 

“그래. 좋아. 그렇다면 너는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거지? 사실 그게 더 궁금해.”

 

“그 질문에도 답변해 줄 수 없어. 나도 내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기 때문이야. 나 어쩌면 아세르왓이 되고 싶은건지도 몰라. 아세르왓은 저 단순한 세계에서 뛰어난 대접을 받고 있잖아. 반면에 나는 지금 이 복잡한 세계에서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경석이 조금 안쓰러웠다.

 

“경석아. 우린 아직 청소년이잖아. 벌써부터 자신이 이 세계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속단하기는 이르지 않을까?”

 

눈물이 살찍 맺힌 경석의 눈알이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경석이 거칠게 물었다.

 

“그렇다면 말해! 너 내가 이 세계에서 쓸모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니? 응? 말해! 솔직하게 말해보라구!”

 

경석이의 목소리에서 왠지모를 한이 느껴졌다. 나는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별안간 복도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소리쳤다.

 

“지섭짱이다!”

 

그러자 여자 아이들이 우르르 복도로 뛰어갔다. 나도 그 틈새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소지섭을 닮아 인기가 좋은 배구부 주장이 나타난 척 속여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소란이 정리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왔다. 경석은 더 이상 내게 묻지 않았다. 난 어쩌면 경석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 경석이 이 세계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될지 안될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난 이상하게 그 순간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경석이 너도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면 쓸모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런 나 자신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경석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면 그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맙소사! 정말 여기에서 끝나버리는 것인가. 별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아세르왓이 과연 숲속의 오솔길을 개척해낼 수 있었는지를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인가. 그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CA수업이 끝나고 반으로 돌아가려는 데, 바닥에 떨어진 노트가 두 권 보였다. 아마 아까 지섭짱 오빠 때문에 난리법석이 났을때 떨어진 것이리라.

 

나는 노트를 집어들고는 반으로 돌아와 읽었다. 첫번째 것은 박진희라는 여자아이의 것으로 ‘설날의 알참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설날의 알참이)

 

이번 설에 시골에 가면 알참이를 만나게 될 생각에 진작부터 두려웠다. 알참이는 누나가 처음 낳은 아들로서 태명이 알참이었는데, 내가 계속 태명으로 부르는 이유는 알참이를 낳고보니 마침 알이 쏙쏙 찬 것처럼 참으로 똘망똘망하게 생겨서, 사장어른이 지은 신병구라는 본명 보다 훨씬 어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보기에만 알찬 것은 아니었다. 다섯 살이라는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 큼의 지나치게 많은 ‘무언가’가 내부에 꽉꽉 들어차 있는 듯 하여 보는 사람이 위화감이 들어 쳐다보기 두려울 정도이다.

 

그 어떤 어른도 알참이 앞에서는 함부러 말을 꺼내지를 못했다.

 


 

알참이는 너무 짧았다. 다음 노트를 펼쳤다. 추가영이란 여자 아의의 것으로 제목은 '천방지축'이었다. 게다가 자전적인 소설인 것 같았다.

 

알참이는 너무 짤았다. 나도 저런 알참이 같은 사람을 안다. 친구인 구운몽의 당백숙이 그러하다.

 


 

(천방지축)

 

새학급이 시작되자 괄괄하기로 소문난 천미나와 방숙희와 지예림이 다가왔다. 그중 리더로 보 이는 천미나가 말하기를 자신은 원래 솔로였으나, 1학년때 방숙희를 만나 듀오가 되었고, 2학 년때 지혜린을 만나 트리오가 되었으니, 3학년인 지금은 나를 포함해서 콰르텟이 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나는 왜 하필 얌전하고 말도 없는 나를 점찍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연찮게도 자신들의 성씨 가 마침 ‘천방지’인데, 기왕 그렇게 된 김에 ‘천방지축’을 꼭 이루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알디시피 ‘축씨’가 아니라 ‘추씨’인데, 내가 끼면 ‘천방지추’가 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또래의 ‘축씨’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따기라서, 대신 나의 이름 ‘가영’의 ‘ᄀ’자를 앞의 성씨 ‘추’자 밑으로 당겨서 ‘추가영’을 ‘축아영’으로 삼으면 된다는 것이다. 덧붙이길 ‘추가영’이란 발음을 얼핏 들으면 ‘축아영’으로 들린다고 하였다.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납득한 나는 ‘천방지축’ 콰르텟에 가입하였다. 그날부터 나는 그들과 밥 을 먹고 수다를 떨고 어디든지 함께 다녀야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의외로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 괄괄한 그들과 함께 하다보니 줄곧 내성적인 줄만 알았던 내안의 외향적인 모습을 발 견하기도 했다.

 

어느날 CA시간에 나와 마찬가지로 친구가 없고 얌전했던 황선미가 다가와 물었다. “가영아. 너 어떻게 하다가 그런 날라리 들이랑 친구가 된거야?”

 

나는 대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름 때문이라고 말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한참 뜰들이다 대답해낸 궁색한 답변은 겨우 이거였다. “글쎄, 예정된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러자 황선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럼 개네들이 니 운명의 친구라도 된다는 말이야?”

 

대답하기가 곤란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화를 내며 말했다. “니가 알바 없잖아!”

그러자 선미는 두려워하면서도 섭섭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거의 화를 낸 적이 없던 나는 스스로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어느새 조금은 변해 버리고 만 것이다. 사람은 다들 이렇게 변하는 건가? 나는 앞으로 나도 모르게 순식간에 변해버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김수경과 박진희가 다가와 나를 학교 뒷편의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유물이 된) 소각 장으로 데려갔다. 먼저 눈이 날카롭게 찢어진 김수경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너 요즘 많아 나대더라? 천민(천미나의 벌명)이랑 친해졌다고 세상이 물로 보이니?”

이어 덩치가 씨름선수 만한 박진희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두꺼운 참나무 가지로 바닥을 북북 긁으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나불거리다간 이곳 소각장에서 아주 소각시켜 버릴 줄 알아!”

 

예전 같았으면 무서워서 벌벌 떨었겠지만 왜인지 이제는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내가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자 김수경이 소리쳤다. “썅년아! 눈 안 깔아?”
박진희도 보탰다. “진짜 뒤질래?”

 

나는 말했다.
“얘들아 진정하고 이성적으로 얘기해보자. 내가 왜 너희들에 의해 뒤져야 하는 거지?”

박진희는 참나무 가지를 휘두르며 덤벼들려 했으나 김수경이 이를 제지했다.

“이성? 좋아. 내 똑똑히 말해주지. 네가 요즘 천민이랑 친해졌다고 함께 천민이라도 된 마냥 설치고 다니는 게 보기 아니꼬와서 그런다. 왜!”

 

“그러니까 내가 얌전하게 있다가 친구들이랑 활발하게 다니니까, 그게 화가 난 다는 거네?”

박진희는 “어디서 주둥아릴 함부로 놀려!”라고 외치며 또다시 덤벼들 듯 했으나 김수경이 재 차 제지했다. 김수경은 말했다.

“응. 맞아. 화가 나. 너 같은 애들은 찌그러져 있어야 마땅한데, 나대는 꼴이 화가 나!”

 

나는 항변했다.
“왜 내가 찌그러져 있어야 하니? 만민이 평등한 시대에 너무 무리한 요구 아냐?”

김수경은 히스테릭한 상태로 말했다.
“바로 그런 말! 그런게 넘너 맘에 안 들어! 지금 여기서 만민이고 평등이고 가 왜 나와! 수업 시간에도 보면 넌 항상 너무 블라블라 한다구!”

박진희는 김수경의 옆에서 참나무 가지를 주물거리며 계속 폭력을 부추겼다. “까자! 응? 제발 까자! 천민 땜에 그래? 그년들도 내가 다 까줄게. 응응!?”

 

김수경은 박진희를 자제시키고 작정한 듯 말했다.
“너 개네들이 왜 놀아주는 지 알아? 다 니 이름 때문이야. 개네들은 강박증에 걸린 변태들이 라 니 이름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천방지축을 이루려 한거라구. 내가 모를줄 알아? 그러니까 넌 개네의 진짜 친구가 아니야. 단지 이름으로만 맺어진 유명무실한 사이라고!”

 

그렇게 말하던 중에 김수경의 눈의 동그랗게 커졌다. 왜인가 보니 ‘천방지‘가 나 축을 구하러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미나가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우리 축이를 괴롭히고 있냐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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