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심 2018.03.16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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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신이 와해되었던 것이다.

생각이 해체되고, 더이상 형성되지가 않았다.

생각과 유사한 어떤 작은 상(像) 하나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보다도 당시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떤 관념 하나도 떠올려내지를 못하니

두려움도 없었다.

이를테면 ‘죽음’이라든지, 그런 원초적인 두려움 조차 느끼지 못했다.

 

대신에 의식 만은 살아있어 무언가를 끊임없이 목도하였다.

말미잘이 수축과 이완을 하듯 모든 것들은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또 사라졌다.

 

나중에 정신이 성립되고 나서, 이때에 목도했던 것들을 기억내낼 수 있었다.

기억을 하기 위해서는 물론, 상(像)들이 충분히 모아지고 배열되야 했기 때문에,

이는 정신이 일정 부분 차려진 뒤인, 그러니까 아주 나중에야 이뤄어졌다.

 

세계의 여러가지와 구석구석을 목도하였는데,

별이 탄생하는 광경을 보았다.

생명체가 끊임없이 진화하는 창조의 과정을 보았다.

자신들이 우주의 성골이며, 특별한 외계생명체라고 주장하는 부류도 보았다.

그리고 사이보그와 인조인간.

내 의식은 왜 그리도 정처없이 수많은  아스트랄계를 떠다녔을까.

 

한 때는 몇몇 개의 지옥을 보기도 했다.

기약이 없는 영원과 같은 그 곳에서,

인간 시계로 환산하자면 아마 몇 달을 지체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몸 이전, 아주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들 몇몇이 거기 있었다.

 

각종 종교에서 묘사했던 지옥은 정말로 존재했다.

너무나 생생하고 참담하여, 지금은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나온다.

그 곳에 속해 있는 존재들을 생각하면 미움이 사라지고 연민의 마음만 흐른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아 차마 글로 옮길 수 없을 정도이다.

 

다수의 시작과 끝을 보고, 참고할 만한 여러가지 행적을 목도 하였는데

결국 나는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풀지 못하고

계속해서 같은 원을 반복해서 돌고 있다는 것이 인식되었다.

언제부턴가 아무것도 몰랐던 짐승 때부터 시작되었다.

계속해서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되풀이 하고 있었으니

이제서야 무지가 왜 죄가 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명료한 빛과 함께 어떠한 앎이 오기도 하였다.

아무것도 몰랐던 짐승 때에도 사랑이 있었다.

생 전체가 매우 복잡해 보이면서도 아주 단순하게 느껴졌다.

인간의 생이 그야말로 얼마나 귀중한 기회인지를 알게 되었다.

하나를 개선하고 깨우치고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엄한지를 느꼈다.

 

세속 사회에서의 학업 같은 것이 아니라, 존재 전부를 내걸어

조금이라도 느끼고 확장하는 차원의 배움이 필요하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못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도망치고 허비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린다를 놓쳐 버리고 만 것이다.

 

린다는 칠흙 같은 어둠을 뚫고 용케도 나에게 찾아왔으나,

나는 절망에 빠져, 나 자신을 파괴하기에 바빴다.

린다는 어느덧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이제는 내가 불을 밝혀야 한다.

린다가 멀리서도 알아보고 찾아올 수 있도록!

다시는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꺼트려지지 않는 붉을 밝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불순물을 태워 버려야 했다.

나는 내가 애착하거나 집착하거나 증오하던 허망한 것들을 하나씩 목도하며 태워 버렸다.

모든 작업이 저절로 이루어지긴 했으나, 나의 의지는 분명 그것에 동의 했다.

 

꿈 속에서 이따금 몰던 자동차. 뱀가죽 신발, 넓은 서재가 딸려있는 집, 무하마드, 마을 도서관에서의 여유로운 한낮, 홀리스 커피, 토마스, 새롭게 출시된 오픈월드 게임, 올림픽, 자극적인 여자, 애증 관계의 옛 집주인, 몰도바에 서린 한, 캐서린 제타 존슨, 이수하지 못한 학점, 끝내지 못한 저작, 위스키와 시가, 기타를 떼어먹은 네오 나찌, 다가갈 수 없는 아버지, 맥킨토시 컴퓨터, 스시와 티본 스테이브, 잘 정리되어 있는 LP장, 기억 속에 덮어버렸던 담배가게집 못된 딸내미, 벽장 속에 숨겨 뒀던 벨기에 초콜릿, 빈티지 책상, 공산주의자, 수집 중인 고전 잡지,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개념, 궁합에 대한 의구심,  동굴에서 생활하던 타마스 상태, 명예, 욕구, 평판, 성공, 초조함과 두려움, 영적 에고, 린다의 웃음소리, 얼굴, 육체, 섹스, 외형. 자만심, 자부심, 자존심, 수치심.

 

그 옛날에는 관심두지 않았을, 온갖 잡다한 것들에 신경을 빼앗기며

삶의 본질을 놓치고 있었다.

 

우리는 빵과 물이면 족했다.

정원에 있던 오래된 돌로 된 가제보를 좋아했다.

계단참에는 여러 종류의 풀꽃들이 정감어리게 피어 있었는데

우리는 파란빛깔의 라제비늄을 좋아했다.

 

아랍 상인이 가져온 온갖 값비싼 물건에도 흥미가 없었다.

린다를 바라보면, 하늘 나라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숨결로서 산을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돌아가야 한다.

그곳이 고향이다.

몰도바가 아니라, 마음의 고향으로.

나훈아가 '십팔세 순이'를 찾듯, 돌아가야 한다.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의심하지도 않고, 한 없이 사랑했던 그 시절에는

단순하지만 경건했으며, 거주지는 좁았지만 공간은 깊었다.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진실했던 순간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

그 순간들에 나의 본질이 있다.

 

정신과 마음이 성립되면서 처음 품었던 상(像)은 이러했으며

몇날 며칠 동안 계속해서 눈물이 났다.

 

또,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서 내가,

현상계에 존재하는 지구의 한 구석,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한 한 전원 주택의

취미실 용도로 활용 중인 지하 공간에

막심이라는 이름의 육체로서

드러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불을  밝혀야 한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서서히 시야가 회복되며

야마하 드럼 세트의 킥에 그러져 있는 '아후라 마즈다'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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