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린다와 응접실

by 동시성 posted Mar 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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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저께 나는 북한강이 보이는 경기도 가평의 한 팬션에서 10년 만에 열리는 동창회 모임에 가서 오랜만에 술에 잔뜩 취했는데, 별안간 정신이 들고보니 깜깜한 밤중이었고, 처음 보는 서양 여자와 함께 난데없이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Who are you?’ 하고 묻자 서양 여자는 한국어로 말했다.

  “왜 갑자기 영어를 쓰는 거죠?”

  여자의 발음은 너무나 한국사람 같아서 립싱크를 하는 것처럼 어색해 보였다. 서양 여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쩐 일인지 불안해보였다.

  “표정이 왜 그래요? 아까랑 다른 사람 같잖아요!”

  혼돈스러운 나는 머리의 균열감이 느껴져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성민씨! 성민씨!”

  얼마 후에 경석이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너희들 여기 있었어? 바람 좀 쐰다더니 너무 안와서 말야.”

 

  기억은 거기까지다. 나는 아마도 경석이를 따라 팬션에 들어갔을 테고 술을 더 마시고 완전히 뻗었겠지. 그런데 그 서양 여자는 누구였을까? 동창 중에 분명 서양인은 없었다. 흑인도 동남아인도 중국인도 없었다. 동창 중 누군가의 애인이라던가 와이프일까? 나는 왜 그 여자와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우물 바로 옆에 돌담 아래로는 청명한 강물이 흐르고 있었는데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방을 둘러보았다. 천장이 대각선으로 기울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다락방 같았다. 작은 창에 달린 낙엽색 커튼은 방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한가운데 놓여있는 목제 침대 말고는 그 어떤 가구도 없었다.

  다락방의 문을 열자 세로로 길쭉한 푸른빛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보였고 그 밑으로 목제 계단이 나 있었다. 붉게 물든 방에서 막 나와 푸른빛이 아른 거리는 계단을 밟으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꽤나 분위기가 고상한 팬션이라고 생각하며 계단참을 지나 조심스럽게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곳은 팬션이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오자 나타난 것은 서양의 오래된 응접실이었다. 어제 술을 마셨던 팬션의 거실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 살고 있는 응접실이다. 가구들도 하나같이 정감있게 적당히 낡아 있었다. 커다란 전면 창에 녹색 커튼이 드리워져 응접실 전체가 마치 여름의 숲속처럼 녹음이 짙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갑자기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은 여기가 한국이 맞기나 한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녹색빛으로 물들어있는 은은한 햇살과 공기는 더 없이 맑고 부드러웠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시곗바늘소리가 전부였는데, 약이 떨어진 건지 초침의 속도가 느렸다. 어쩌면 이곳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용기를 내어 탁자를 감싸고 있는 쇼파 중에 가장 작고 둥그런 쇼파에 앉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같은 경험을 한듯한 기시감이 들며, 오래전에 꾼듯한 꿈의 한 조각이 생각났다. 아마 몇해전인가 꿈속에서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그때는 젊은 흑인 남자와 중년의 백인 여성이 있었고 거대한 러시아 여자와 지팡이를 든 아랍 남자가 있었던 것 같다. 무언가 중요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꿈의 조각은 미세하여 잡힐듯하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달아나 버렸다. 술이 덜 깬 걸까? 아니면 잠이 덜 깬 걸까?

  어쩌면 자각몽을 꾸고 있는 걸까? 하지만 자각몽도 이처럼 생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떤 특수한 환각을 겪는 중일까? 어제는 또 왜 그렇게 빨리 필름이 끊긴 거지? 그 서양 여자가 몰래 술에 마약이라도 탄 걸까?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여기는 아마도 현실일 것이다. 어쩌면 그 서양 여자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온 걸지도 모른다. 나는 어제 우물에서 그녀와 무슨 얘기를 했을까? 

 

  그때 현관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린다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린다는 어제께 봤던 바로 그 서양 여자였다. 그 여자가 린다였다니! 게다가 나는 린다가 린다라는 것을 별안간 알아차렸다. 린다가 등장하는 동시에 또다른 꿈의 조각들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 조각들은 린다에 대한 기억의 맥락을 재빨리 제공해주었다. 그 기억 속에서 린다는 내가 사랑하고 언제나 그리워하던 인물이다. 떨리는 음성으로 린다에게 말했다.

  “린다. 보고 싶었어.”

  그토록 보고 싶었던 린다를 직접 보니까 막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린다가 아니라 린다의 밀랍인형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게 얼마만이지?”

  린다는 홀로그램 영상처럼 말없이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바로 몇 분 만에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몇백년 만에 보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야.”

  린다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제 만났었잖아.”

  그래. 어제 그 서양 여자는 분명히 린다였다. 지금 보니까 얼굴도 거의 똑같은데 어제는 왜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을까? 린다는 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내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어서일까.”

  그랬다. 그 서양 여자. 아니 린다는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김경석, 학창시절 리더십이 강하고 기타를 잘 치는 남자였다. 가끔씩 나에게 담배를 주곤 했는데 가까운 사이는 아니였다.

  “아니야. 아마도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럴거야.”

  “술? 술 때문이라고?”

  린다는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웃고는 말했다.

  “난 네가 전혀 다른 외모의 한국인으로 태어났는데도 한 번에 알아봤단 말이야.”

  그제서야 나는 내가 어느새 한국인 이성민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여기가 어디지?”

  린다는 불현 듯, 슬픈 빛이 감도는 눈동자로 말했다.

  “여기는 우리가 예전에 살던 곳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잖아.”

  “우리가 이런 곳에서 함께 살았다고?”

  린다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을 모아 내 이마를 향해 허공을 톡 치며 말했다.

  “계속 지금의 너로만 있을 필요는 없어.”

  그러자 린다와 함께 살았던 기억이 한 순간에 물살처럼 떠밀려 왔다. 나는 고개를 다리 사이에 처박고 울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다기 보다는 내 안의 어떤 것이 자동으로 울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를 구하지 못했어! 니 말대로 함께 죽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럴 수 없었어! 내가 죽더라도 니가 잘 살 수 있기를 바랬어! 바보 같이! 바보 같이!”

  그러자 린다가 다가와 말했다. 그리운 그 시절, 그 목소리로.

  “당신의 헌신 때문에 외롭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의 사랑 때문에 다시 태어났어요.”

  나는 린다를 덥석 껴안으려 했다. 그러나 린다는 연기처럼 잡히지가 않아, 나의 두손은 그대로 린다를 통과하였다.

  “린다! 어떻게 된거야?”

  린다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나는 다시 태어났다구요.”

  미소를 짓고 있는 린다는 어느새 점점 투명해져 가고 있었다.

  “린다! 가지마! 갑자기 어디로 가는거야!”

  등 뒤로 콘솔과 액자가 비쳐질 만큼 린다가 투명해지자, 나는 발작적으로 두 손을 모아 빌면서 소리쳤다.

  “안돼! 제발! 린다! 가지마!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가지마!”

  나의 부질없는 절규를 뒤로 한 채 린다는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털썩 쇼파에 주저 앉았다. 뿌연 공백 속에 들리는 건 시계 소리뿐이었다.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다니! 이곳은 현실이 아니구나. 그런데 린다와 나는 방금 무슨 얘기를 나눴지?

  나는 린다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꿈에서 깬 뒤 지워지려는 꿈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아무 소용도 없었다.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 린다라는 이름조차 망각하려는 찰라, 심장이 뭉클하게 아파오며 내부에서 하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를 버려두지 말아요!”

 

  나의 몸은 로봇처럼 자동으로 쇼파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향해 걸었다. 마음 속에서 같은 말들이 되풀이 되었다. 나가야 한다. 나가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야 한다. 찾아야 한다. 찾아야 한다.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으려 다가서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현관문에 달린 손바닥 만한 창을 통해 바깥을 얼핏 보았는데, 바깥은 바깥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형상은 물론 색채도 없어 검은색인지 흰색인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원초적인 공포가 밀려오며 몸이 덜덜 떨렸다.

  바깥으로 나가면 죽는게 아닐까? 영원히 소멸해버리는 게 아닐까? 대체 왜 이렇게 되버린 걸까? 악몽이라면 빨리 깨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다시 윗층에 올라가서 잠을 들었다가 깨어나면 예전처럼 되어있지 않을까? 북한강이 흐르는 팬션에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까?

 

  어쩌면 동창회에 간 것부터 전부 꿈일지 모른다. 10년만의 동창회를 갈까 말까 한 참을 망설이지 않았던가. 딱히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는데 왠지 가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결국 가지 않기로 정하고 잠에 들었다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윗층에 올라가 잠들면 내 방의 익숙한 그 침대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동창회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생각은 갈피를 잃어 끊임없이 여러 곳으로 세어나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머리가 이상해졌을까? 나는 정말로 동창회에 간 것이 아닐까? 그들은 별로 친하지도 않던 나를 왜 초대 했을까? 필로폰 같은 것을 몰래 먹인 것이 아닐까? 그 서양 여자가 나에게 필로폰을 먹였을까? 그래서 필름이 끊긴걸까?

  순간 무언가 커다란 것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싸이렌 소리가 크게 울려퍼지며 엄청난 공포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녹음이 졌던 맑고 투명했던 응접실은 어느덧 생기를 잃고 인공적인 세트장처럼 변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각인했다. 기억해야만 한다. 아까의 그 빛깔과 공기를! 우리는 오래전에 그곳에서 함께 살았다.

  앙맹이를 잃어 앙상해진 세트장은 점점 허약해져 형체와 빛깔을 잃어가고 있었고, 현관문을 열고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써봐도, 몸이 굳은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붕괴 속에 갇혀 버리면 안된다. 차라리 저 바깥의 허공이 낫다. 하지만 현관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극심한 공포가 몰려왔다. 그래. 생각났다. 나는 이처럼 단단하고 갑갑한 곳에 갇혔던 적이 있다. 그곳은 어두웠고 외면과 내면의 모든 것을 붕괴시키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그녀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 무차별 적인 암흑도 오직 그녀를 위한 나의 기도만큼은 붕괴 시키지 못했다. 지금 이곳에서도 같은 붕괴가 밀려오고 있다. 응접실의 모든 가구들도 흐물흐물 거리며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기도를 하는 마음으로 현관문의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생각났다! 린다. 그녀를 찾아야 한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다 사라졌다. 나는 이 문을 박차고 나가서 린다를 구해내야 한다. 이 붕괴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 세계에서 그녀를 만나야 한다.

  우리는 응접실에서 함께 기도하고 노래를 했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나는 마음으로 모든 걸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영주의 눈에 뛰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의 천국을 이루었다. 영주의 기사들이 현관을 부수고 있을 때 그녀는 말했다.

  “죽여주세요. 나를 버려두지 말아요!”

  우리는 함께 죽었어야 했을까.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지하의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녀는 영주의 포로가 되었다. 시간을 헤아릴 수 없는 영원 같은 밤 속에서 언제나 기도했다. 그녀를 해방시켜 주세요. 그녀를 구해주세요. 그녀를 해방시켜 주세요. 얼마후 그녀는 자살을 했다.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마음으로 외쳤다. 그녀를 해방시켜 주세요. 그녀를 구해주세요. 그녀를 해방시켜 주세요.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에 뜨거운 기운이 모이면서 자동으로 돌아가고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새로 하얀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녀가 없는 세계에 더 이상 거기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때도 지금과 같은 입자의 하얀빛이 비쳐졌다. 그 빛 사이로 그녀가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2>

 

  하얀빛 속에서 잃어버렸던 기억이 돌아왔다. 나는 사교성도 없었고 동창회에 나갈 만큼 친한 친구도 없었지만 동창회에 나갔다. 왠지 나가야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경식이라는 사람을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렇기 때문에 동창회에 나가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그와 내가 대등한 위치로 한 자리에 있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고쳐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데리고 온 서양 여자를 보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일까?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심장에서 자꾸 검은 숨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경석은 지난 시절을 다 잊은 것처럼 나를 친근하게 대했다. 술도 따라주며 함께 했었던 괴로운 시간들을 추억인 것 마냥 떠들어댔다. 나는 그에게 맞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로인해 많은 죄의식에 괴로워했다. 그런데 그는 내가 동등한 관계로 허물없이 함께 놀았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경석은 정말로 잊어버린 걸까? 기억이 왜곡된 것일까? 그의 눈동자 속에 있는 변하지 않은 날카로움을 보고 나서야 그가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서양 여자에게 눈길이 갔다. 경석이와 살고 있는 이 여자는 대체 누구일까. 그 여자는 가슴이 부각되는 티셔츠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음에도 차도르나 부루카를 두른 것처럼 업악되어 보였다. 경석은 서양 여자를 소개해줬다. 조교수할 때 교환학생으로 왔던 여잔데 한국말을 엄청 잘하더라. 내가 찍었지. 2년 전에 결혼했어. 인사들 나눠.

  그녀와 눈동자를 마주쳤을 때, 나와 똑같은 공기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괴로운 마음이 들어서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고는 인사불성이 되어갔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무슨 술을 그렇게 빨라 마시나며. 밖에 나가서 강바람을 좀 쐬면 술이 금방 깰거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도 술을 깨러 나간다고 말했다. 경석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팬션 뒤의 정원을 말없이 걷다가 우물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말했다. 당신도 나와 같은 걸 느끼고 있나요.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신기하다고도 했다. 불현 듯 그녀가 말했다. 우리 여기서 죽어버릴까요? 깜짝 놀랐다. 여자는 울면서 말했다. 자기는 경석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강간을 당했다가 억지로 결혼하게 되었고 계속 붙잡혀 있다고.

  강바람이 한차례 불고 지나가며 그녀의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 같아 보였다. 여자는 말했다. 우물 안을 들여다봐요. 무슨 통로 같아 보이지 않아요? 이 우물이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자 우물 안은 어떤 경계도 없는 무한한 홀이 되었다. 우리는 시공간이 흐트러진 우물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두 목소리는 우물 속에서 때로는 엉키기도 하고 굴절이 되기도 하며, 서로의 영혼에 울려퍼졌다.

  “날 버려두지마! 절대로 버려두지마! 알았어. 버리지 않을게! 절대로 버리지 않아! 나랑 같이 죽을 수 있어? 죽는다고? 기억 안나? 우린 그때 같이 죽었어야 했어! 널 죽일 수가 없었어. 내가 어떻게 널 죽일 수 있었겠어! 하지만 넌 날 버려둔거야. 아니야. 나는 널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 매일 밤 너만은 잘 살라고 기도했어. 그게 불가능했지! 그때 내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 섹스토이가 됐어! 팔다리를 묶인 채로 매일 매일 그 짓을 당했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어리석었어. 내가 잘못했어. 그럼 이제는 죽을 수 있어? 죽는다고? 이젠 같이 죽어줄 수 있어? 내가 잘못했어. 나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어? 응. 목숨을 걸 수 있어. 에전부터 그래왔으니까. 같이 죽어줄 수 있어? 지금 말이야? 지금 말이야. 지금 말이야? 뛰어 내리자. 뛰어 내리자. 뛰어. 안돼. 왜?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왜 안돼! 나를 또 버려둘거야? 아니야. 하지만 죽으면 안돼. 죽는게 아냐. 이건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란 말이야. 죽으려는 게 아냐. 같이 걸어 보려는 거야. 나는 그동안 너를 살리기 위해 살아았어. 그리고 이제는 살릴 수 있어. 뭐? 나를 살릴 수 있다고? 살릴 수 있어. 너를 살리려고 몇백년 동안 노력했어. 정말이야? 나같은 애도 살 수 있어? 나 같은 애도 살 수 있는 거야? 물론이야. 살 수 있어. 살 수 있어. 어떻게 살 수 있어?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이번에도 엉망이 됐는데? 봐봐. 내 꼴을 보라구! 아니야! 괜찮아. 할 수 있어! 이겨낼 수 있어! 살 수 있어! 뭘 어떻게 할건데? 경석이는 어떻게 할껀데? 경석이? 지금 봐봐. 기억이 지워지고 있어. 어. 정말이야. 이렇게 기억이 지워지고 있어. 어떻게 하지? 기억해야 돼! 나를 기억해. 망각이 머리를 덥치고 있어. 나를 꼭 기억해. 너를 기억할게. 나를 꼭 기억해. 나를 기억할게. 기억할게. 너를 기억할게.............................................”

 

  그리고 나는 결국 서양 여자와 나눈 우물 속의 대화를 모두 잊어버렸던 것이다.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봐요! 정신차려요! 성민씨! 성민씨!”

  어느새 나타난 경석은 이상한 공기를 눈치챘는지 나에게 특유의 험악한 인상을 쓰면서 말했는데, 뒷 문장만 알아 들었다.

  “......우물에 빠지고 싶지 않으면!”

  예전에 수도 없이 봤던 바로 그 얼굴이다. 경석은 서양 여자의 어깨를 감싸며 끌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서 자야지.”

  죽음 같은 눈빛으로 경석에게 끌려가는 여자를 보고 나는 이대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물 속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려고 필사의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우물 자체는 기억이 났다.

  한때 그곳은 시공간이 흐트러진 또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로 존재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 기억의 조각을 찾아야 한다. 우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이야기들을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간절함이 있지 않았던가! 그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나는 괴성을 지르며 우물로 뛰어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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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응접실을 빠져나와 하얀 빛을 따라 걷자 문이 하나 보였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문을 열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문을 열고 나면 무엇이 있을까? 죽음이 있을까? 그렇다면 저 문 밖에 있는 곳은 천국일까? 지옥일까?

  만약 삶이 있다면 어떤 삶일까? 나는 또 다른 내가 되어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한국인 김성민 일까? 우물로 뛰어내렸는데 혹시 불구가 되어있을까? 아니면 멀쩡할까? 내가 뛰어내린 곳은 그저 우물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였을까?

  그러니 이번에는 두렵지가 않았다. 나는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밝은 햇볕이 쏟아지면서 린다의 얼굴이 보였다.

 

  “성민씨! 성민씨! 나 보여요? 나 알겠어요?”

  나는 김성민으로서 병실에 누워있었다. 발목 하나에 깁스를 했었으나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다행히 그 우물은 평소에는 말라있는데 비가 온지 얼마 안돼, 물이 적당히 고여있었다는 것이다. 린다는 그날부터 내내 병실을 지켰다고 한다. 경석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처음 보는 남자 때문에 왜 이려냐고 집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린다는 묵묵부답이었다. 사람이 자살하려는 것을 보고 린다가 정신병이 걸렸다고 판단한 경석은 오히려 이혼을 요구했다. 아마도 다른 여자가 있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경석이 나를 우물에 빠뜨린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우물은 아니지만 그는 나를 하룻밤 동안 물탱크에 가둬놓은 적이 있었다.

 

  체감하기로는 하루 같았는데 내가 코마 상태에 있었던 것은 무려 40여일이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모든 게 변해 있었다. 마치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를 빠져나온 것처럼. 린다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너를 깨우기 위해서 찾아갔었어!”

  나는 반짝 거리면서 빛나는 린다의 눈을 보며 말했다.

  “알아. 린다와 그 응접실.”

 

 

<4>

 

린다와 응접실에서 사랑을 나눴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빵을 나눴다

 

그대로만 있다면 세상은 천국이었다

누구보다도 우리는 하루에 충실했다

 

빛을 질투한 그는 검은 계략을 꾸몄지만

세월은 거짓을 지우고 진실은 드러난다

 

린다와 응접실에서 사랑을 나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음식을 나눈다

 

그동안 세상은 변해 빛의 영역에 들었다

다시는 붕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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