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벙어리 동산

by 동시성 posted Mar 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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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벙어리 동산에 머무른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되어 간다. 오구미는 오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오구미는 서양 남자와 혼인하여 북미로 도망쳐버렸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돈을 되찾으려면 이 정도의 인내는 필요한 것이다.

  여기 와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싸는 것 외에는 소를 지켜보는 일 밖에 없다. 먹는 시간을 다 합해도 하루에 채 사십분을 넘지 않으며 싸는 시간도 이동 시간을 합해서 이십 여분이면 족하다. 자는 시간도 일곱 시간을 넘지 않으니 나머지 열여섯 시간, 무려 하루의 삼분의 이를 오직 소를 지켜보는 일에만 할당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부터 이런 식은 아니었다. 등산도 해보고 독서도 해보고 만들기도 해보고, 아무리 돈을 받으러 온 빚쟁이 신세라지만 나름대로 인간답게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목동과 둘만 지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목동의 일상에 동화되어 하루 종일 멍하니 소만 지켜보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런 단조로운 환경에서도 마음의 경건함을 지켰던 알픙스 도테의 ‘별’에 나오는 양치기가 새삼 경이롭게 느껴졌다.

 

  목동은 소를 지켜볼 때만큼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말도 걸어보았지만 듣지 못하는 것인지 무시하는 것인지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소를 보는 것이 지겹지 않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상황을 인지하는데 수초가 걸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아, 달리 할 것도 없는데요.”

   목동은 아주 오랜만에 나를 또렷이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나야 일이라서 견딘다지만 그쪽도 참 대단하구만. 젊은 사람에겐 특히 쉬운 일이 아닐텐데.”

  “이게 겨우 한 달인걸요. 그보다 목동께서는 소를 지켜보신지 십년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목동은 어렵게 기억을 떠올리는지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IMF가 난 다음에 거 뭐였지, 월드컵 4강인가 뭔가 할때쯤 들어왔으니까 십년은 진즉에 넘었겠구만.”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들어왔다고? 그렇다면 목동은 무려 15년을 이곳에서 소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까마득한 2002년부터 지금까지의 복잡다단했던 나의 삶을 떠올려 보니, 그 긴 세월을 같은 곳에서 같은 행위만 했던 목동의 삶이 실감이 나며 가슴이 철렁했다. 목동은 대체 어떤 인생을 통과하고 있는 것인가? 밤이 되어 숙소로 들어가서도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스튜를 끓이고 있는 목동의 뒷모습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도 가끔씩은 문명의 이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취미가 생긴다거나 삶의 활력을 줄 수 있는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목동에 등 뒤에서 나지막하게 말해보았다.

  “한 달간 지켜봤더니 나름대로 어떻게 소를 대하는지 정도는 알겠습니다. 내일은 제게 소를 맡기고 읍내라도 나가서 즐기고 오시는 건 어떨지요?”

   그러자 목동은 열심히 젓던 국자를 냄비 속에 턱 집어던지고는 고개를 휙돌려 부엉이 같은 눈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도회지 말이여!? 드러운 거짓과 탐욕이 넘쳐나는 벼락 맞을 도회지를 내가 왜 가는가!”

 

  나는 그제 서야 목동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레 알아차렸다. 그는 틀림없이 바깥세상에서 커다란 상처를 입고 이곳 벙어리 동산으로 도망쳐온 것이 분명하다. 오구미는 이런 가련한 사람들을 잘도 모아서 일을 시키며 부당이익을 취해온 거겠지? 내 돈을 떼어 먹은 것도 모자라 이런 패륜적인 짓을 일삼아왔다니, 나는 오구미에게 더욱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오구미, 망할년! 별처럼 반짝이던 눈동자만을 믿고 돈을 빌려줬는데! ‘와따주부’라는 우습지도 않은 닉네임으로 이런 가련한 자들 위에서 군림해왔단 말인가? 서양인과 혼인하여 서양으로 토껴 버렸다는 소문도 있던데. 다리를 뻗고 잘도 잠을 자겠지? 개도 한 마리쯤 기르고 있을지 모른다. 개와 서양인은 모를 것이다. 별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 속에 숨겨져 있는 무서운 본색을!

   떡갈나무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벙어리 동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 마음이 쓰였고 오구미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지를 않았다. 오구미, 너는 벙어리 동산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동산은 말이 없지만 너를 애타게 기다린다. 목동도 얼마남지 않은 사람들도 다수의 소와 여러 마리의 개들도 마찬가지다. 멋대로 정을 뿌리고서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너는 돌아와야 한다. 니가 뿌린 씨앗을 거두어야 한다. 벙어리 동산이 이처럼 말없이 절규하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잠에 들었으나 까마귀 울음소리에 얼마안가 깼다. 밖으로 나오니 막 잠에서 깬 태양이 벙어리 산(啞山)의 능선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황홀하여 넋을 놓고 바라봤다. 이렇게 일찍 일어난 적이 없어서 처음 보는 광경이다. 어느새 목동이 옆에 서있다. 목동은 언제나 일찍 일어난다.

  “와따주부가 돌아올지도 모르겠구만.”

  뭐라고? 와따주부가 돌아온다고? 목동은 방점이 찍힌 문장을 읽듯 강조하며 말을 이었다.

  “다만, 직접 완전히 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완전히 가 아니라면 어떻게 오는 겁니까? 잠깐 왔다 가는 식인가요?"

  목동은 조급해하는 나를 나무라는 듯 고개를 아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이런 건 그 뭐야, 아날로그라서 디지탈처럼 딱딱 떨어지는게 아니지.”

 

  달리 믿을 것도 없기 때문에 목동의 말을 믿기로 했다. 오구미는 돌아오는 즉시 금방 내뺄지도 모르기 때문에, 즉시 붙잡을 수 있도록 동산의 입구와 제일 가까운 물레방앗간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물레방앗간은 경사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창문을 통해 동산의 입구를 훤하게 내다볼 수 있다. 오구미가 대리인만 들여보내고 자신은 입구 밖에서 기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폭넓게 관찰해야 한다. 목동은 오구미가 직접 완전히 오는 것일지는 모른다고 했다.

  헤어지면서 마지막 악수를 나누려는데 목동이 별안간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목동은 내 눈을 노려보다시피 하며 말했다. 목동의 눈동자 초점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죽은 아들과 닮아서 하는 말인데, 이런 곳에 다신 오면 안돼!”

 

 

<2>

 

  물레방앗간은 ‘물레방아관’이 되어있었다. 방앗간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이나 그래도 물레방아가 온전히 남아있으니 일종의 박물관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관장은 설명했다. 친환경 탈곡과 제분을 위해 유지되던 물레방아간은 벌써 6년 전에 문을 닫았다. 관장은 물레방앗간을 닫으며 물레방앗간 수석제분사에서 물레방아박물관장으로 셀프 취임하였는데, 어느 누가 이 보잘 것 없는 산골에 처박혀 있는 수상한 공동체에서 물레방아를 관람하려 들겠는가. 그럼에도 관장은 거금을 들여 대대적인 공사를 통해 이 기이한 공간을 창출해낸 것이다.

  용도가 없는, 우주에서 몰래 버려지기라도 한 것 같은 이 수상한 공간의 사물들은 하나같이 낡았고 텅 비어있는 느낌을 주었다, 사람 없는 관광지의 철지난 야외 수영장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물레방아의 유례에 관한 설명판이나 몇 개의 안내판은 이곳도 박물관이 맞다며 억지를 부렸는데, 마치 전갈이 색을 칠하고 가재인 척 하는 것처럼 교묘하면서도 궁색했다.

 

  “오구미는 언제 올까요?”

  식사 도중에 내가 묻자 관장은 먹던 빵을 도로 뱉어내면서 매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 정말로 와따주부가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목동께서 올 거라도 했잖아요. 직접 완전히 오는 건지는 모르지만요.”

  관장은 크게 한차례 웃더니 옆으로 다가와 갑자기 내 등을 두드리며 나를 편한 사람 대하듯 말했다.

   “돈 받으러 왔다 길래 뭐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자네도 여간내기가 아니구먼. 아니, 목동의 말을 그렇게 쉽게 믿어 버리면 어떻게 하나? 자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말을 너무 쉽게 믿어버리는 거 아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항변했다.

  “마음은 답답한데 기댈 곳도 없고, 저도 속는 셈 치고 믿어본 거 에요!”

  관장은 다시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그래. 알겠어. 뭐 그럴 수 있다고 치고, 아까 직접 완전히 온다는 건 무슨 소리야?”

  관장은 예리한 사람인 것 같았다. 말 수가 적고 두루뭉술하던 목동과는 반대 타입이다. 

  “직접 완전히 오는 게 아닐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관장은 신이 난 표정으로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탁 치며 말을 했다.

  "봐봐! 벌써 말에 어폐가 있잖아. 아니, 사람이 오면 오는 거고 안 오면 안 오는 거지. 직접이 아닌 건 뭐고 완전히 가 아닌 건 또 뭔가? 절반만 온다는 거야? 아님 유령이 온다는 거야? 알 수가 없잖아. 그 양반은 너무 매사에 맺고 끊음이 정확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해. 너무 소만 봐서 그렇게 된 거라고!“

  관장은 말의 어떤 마디마다 탁자를 두드리는 강박증적인 버릇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 탁탁 거리는 소리는 불규칙한 것 같으면서도 규칙적이어서 은근히 리드미컬하였다.

  “그런데 그 양반이 와따주부가 온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목장에는 인터넷도 안 깔려 있는데 이메일을 받은 것도 아니고, 전화선도 안 깔렸는데 전화를 받을 수도 없고, 그게 아니면 비둘기가 물어다준 편지를 받았을까? 어쩌면 텔레파시로 교신을 했는지도 모르지!”

  아뿔싸! 인터넷도 없이 전화도 없이 인편을 통한 교류도 없이 홀로 살고 있는 목동이야말로 와따주부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을 통로가 전무 하다는 것을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했을까! 한 달 내내 소만 보고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마비가 되었나 보다. 관장은 다시 탁자를 두드리며 말을 시작했다.

  “목동, 그 양반은 소를 너무 오래 봐서 미쳐 버렸어. 원래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소문에 따르면 옛사람들이 별자리를 보듯이 소의 얼룩을 보며 점을 친다는데, 그거 믿을 수 없는 거 아니겠어? 그걸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소점? 얼룩점? 하여튼 그 양반도 딱하긴 딱하지. IMF때 도산을 당해서 가족들도 죄다 죽고 자기만 살아남았다네.”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그리고 목동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나는 예전부터 점이나 주술 따위를 기피하였다. 하지만 달리 어쩌겠는가! 나는 어차피 오구미가 올 때까지 기다릴 참이고, 소를 보는 것에는 신물이 났으니 이제부터는 이곳 물레방아관에서 물레방아만 보고 있으면 그만이다. 돈을 되찾으려면 이 정도의 인내는 필요한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 잡고는 물레방아관에서의 첫 잠자리에 들었다.

  일본제 접이식 침대를 배정받았는데 자리는 그런대로 편안했다. 철지난 조용필의 노래가 무한 반복된 채로 밤새도록 새어 나왔는데,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와 묘하게 어울렸다. 최악인 것은 어디서 구해왔을지 모를 파란빛을 쏘아대는 특수조명이었는데, 천장을 푸른빛으로 실룩샐룩 물들여 기분이 더욱 싱숭생숭하였다. 당연히 잠이 오질 않았다. 실수로 잊혀져버린 우주의 어느 대기실에서 한없이 방치된 듯한 공허한 기분과 함께 미묘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삶이 시작되었다. 달리 할 것도 없었을 뿐더러 다른 것을 하자니 마음만 복잡해질 것 같았다. 관장은 물레방아를 지켜볼 때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 덕분에 별다른 생각도 말도 없이 하루의 대부분을 물레방아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정신이 점차 헐렁헐렁해지기 시작했다. 관장에서 경이감이 들었다.

  “목동께서도 그렇지만 관장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어쩌면 한 결 같이 한 가지만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관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 사레를 치며 말했다.

   “단순한 것이 좋으니까. 최대한 안사는 것처럼.”

  최대한 안사는 것처럼 사는 삶이라니. 이 사람은 또 어떤 사연이 있길래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왜 하필 물레방아를 택하신 거죠?”

  한참 후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물레방아를 보며 속죄를 하고,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물레방아에 시선을 돌렸다. 물레방아를 보며 관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물레방아를 보며 속죄를 한다. 물레방아를 보며 추억을 떠올린다. 물레방아를 보며 속죄를 하고, 추억을 떠올린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아픔 같지가 않다. 물레방아를 보며 그 아픔 속으로 들어간다. 슬픈 감정들과 함께 어떤 이미지가 떠오른다. 물레방아가 돌 듯 자연스럽게, 그 심상으로 잠겨든다.

 

 

<3>

 

  아마도 중국 사람인 것 같다. 물레방앗간에서 쉼 없이 일을 한다. 언제나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며 같은 것을 먹으며 같은 일을 반복한다. 물레방앗간의 한쪽 구석에 낡은 침대와 약간의 생활 도구와 집기가 있다. 좀처럼 그곳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만나야할 친구도 가족도 없다. RPG게임의 NPC처럼 단조로움이 반복되는 삶이다.

  그러나 이따금 밤중에 여인이 찾아온다. 청순하면서 아름다운 여인이다. 행색을 보면 방앗간 지기보다 신분이 한참은 높다. 어쩌면 물레방앗간 주인의 딸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때로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가 그들의 운명을 재촉하는 것처럼 들린다. 남자는 가끔 여자에게 말없이 말한다. 비천한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그러면 여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다.

 

  여자가 오지 않는 날에는 남자 혼자 물레방아를 바라본다. 어떤 날은 마음이 아파져 온다. 물레방아를 보다 보면 알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때가 있다. 그 속에서 남자는 키가 큰 네덜란드 사람일 수 있고 여러 개의 풍찻간을 운영하는 부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단지 풍차간만 운영하는 경영자가 아니라 풍차를 다룰 줄 아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유복하게 살던 그는 풍찻간에 새로 들어온 이주노동자인 집시 소녀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알던 소꿉친구였던 아내에게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결혼을 해버린 것이 실수였음을 단번에 깨닫는다. 하지만 이미 한참 늦어버렸다. 그와 집시 소녀는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외딴 풍찻간에서 밤마다 사랑을 나눈다.  

   남자는 말한다. 너는 여전히 떠돌고 있었구나. 여자도 말한다. 당신도 그렇네요. 너를 망각하고 이미 결혼을 해버려서 미안해.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남자는 세상에서 온갖 비난과 버림을 받더라도 이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바로 그날 밤, 풍찻간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이 장모와 하녀에게 발각된다.

   장모는 집시 소녀를 추방시킨다. 집시 소녀가 재산을 빼앗기 위해 술과 향을 이용해 주인집 남자를 꼬여낸 것으로 일을 마무리 하려는 듯하다. 남자는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으나 그랬다가 오히려 집시 소녀가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 그만 둔다. 남자는 마을에서 추방당하는 집시 소녀가 황량한 바닷가 언덕을 넘어가는 모습을 제일 높은 풍찻간 꼭대기에서 바라보며 꺽꺽 하고 울었다.

 

  물레방아를 보던 중국인 남자도 어느새 울고 있었다. 남자는 초조한 마음으로 방을 동동 굴렸다.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그 집시 소녀는 언덕을 넘자마자 바로 살해당했다는 것을! 집시 소녀는 자신의 처할 운명을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몰랐다. 아니, 어쩌면 알았다. 그 앓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마음 안으로 스스로 숨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밤이 되자 여자가 찾아왔다

  “우리는 예전에도 지금 상황과 비슷했던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이대로 가다간 죽임을 당하게 될 거야. 당신은 이제라도 나를 떠나 약혼자에게 가는 것이 좋겠어요."

  여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치도 않아요! 나는 절대 가지 않아요! 당신이 날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철철 흐르는 여자의 눈물을 보며 남자는 결심을 했다. 

  “여기서 도망칩시다! 채비를 해서 내일 이 시각에 다시 만나는 거야!”

  남자가 여자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밤 여자는 자신을 의심하여 뒤를 밟은 약혼자에게 살해를 당했고, 남자 역시 곧 여자의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남자는 여자의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별처럼 반짝이던 그 아름답던 밤에, 왜 바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두고두고 후회를 하며 죽었다.

 

  “이봐. 괜찮은가?”

  관장이 어깨를 툭 치자 나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관장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자네 혹시 보았나? 중국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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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장은 내 앞에 커피를 내밀었다. 벙어리 동산에 온지 사십 여일이 지났지만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난 어릴 때부터 기계 같은 거에 관심이 많았어. 라디오랑 텔레비전이랑 집안에 있는 전자제품을 전부 뜯어봐야 직성이 풀렸거든. 특히 전기에 관심이 가더라고. 인력이나 수력이나 풍력은 이해가 가는데, 전력이라는 것은 어린아이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거거든.”

  관장은 조금 들떠있는 것도 같고 흥분한 것도 같았다. 전에 없는 일이다. 내가 중국남자를 보았기 때문인가.

  “전기. 나에게 전기라는 것은 무얼까, 일종의 마법 같은 거라고 생각했어. 사람들이 등한시하는 마법을 보편화하고 대중화한 거라고 봤지. 물론 전파에도 관심이 많았어. 서울방송이 처음 나왔을 때는 전용 안테나가 필요했는데, 서울방송을 보려고 여기저기서 쇠붙이를 이용해서 거대한 수제 안테나를 만든 적도 있거든.”

  “서울방송이라면 SBS를 말하는 겁니까?”

  관장은 내 질문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듣지 못한 것인지, 본론과 상관없는 세부라서 잘라버린 것인지 알 순 없으나, 소통이라기보다는 방송을 송출하듯 일방적인 상태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기대하던 서울방송은 안 잡히고 웬 중국방송이 잡히더라고. 자네 세대는 모를 거야. 90년대 초반에 손수 만든 안테나로 외국방송을 수신하는 게 얼마나 신비로운 지. 당시 어린아이의 눈으로서는 그건 우주와의 접속 같은 거야. 아까 자네가 물레방아를 통해 중국 사람을 본 것에도 비견할 수 있지.” 

  관장은 탁자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컴퓨터는 경이로운 세계였어. 8비트 시절부터 빠져들었지. 그때는 CGA 그래픽만 봐도 감동적이었어. 베이직이랑 코볼이랑 쓸데없는 것도 많이 배우고, 남들 따라 음악을 하겠다고 아타리라는 컴퓨터를 배운 적도 있어. 공부는 지독하게 못했는데 다행히 정보산업 고등학교라는 게 생겨서 거기로 갔어. 그다음 군대갔다오고 다시 컴퓨터를 찾아서 용산에 취직을 한 거지.”

  관장은 어느새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시원한 저녁 공기와 어울려 정취가 감돌았다. 공기가 조금씩 부드럽게 바뀌는 느낌이 들면서 갑갑했던 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나는 도시로 왔지만 그 여자는 계속 시골에서 자랐어. 내가 컴퓨터로 페르시아의 왕자를 하고 있을때 그 여자는 양수기를 보며 자랐고, 내가 컴퓨터로 프린세스 메이커를 할때 그 여자는 제분기를 보고 있었던 거지.”

  “프린세스 메이커는 저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관장은 나의 말에 눈짓으로 간단히 응답했다. 드디어 쌍방향 소통이 시작된 것이다. 좀 전부터 바뀐 듯한 공기 속에는 오래되어 절어있는 느낌이 드는 슬픔이 감돌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물었다.

 

  “그 여자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괴로운 표정의 관장은 다소 과격하게 말했다.

  “사실 이번 생은 절호에 찬스였는데!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잘 알았거든. 그런데 내가 너무 맛이 가버린 거야. 오만해지기도 하고. 용산에서 고작 200만원 조금 넘는 돈을 벌면서 콧대가 높아져서는! 전기 문명의 쾌락에 빠져서, 그 시골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았던 거지! 그래서 또 실수를 해버렸다네.”

  “어떤 실수를 했다는 겁니까?”

  관장은 탄성을 지르듯 말했다.

  “또 다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리고 말았다네!”

  역시나! 했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짐작했던 것처럼 이 사람은 내가 물레방아를 통해 본 중국 남자가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국 남자가 물레방아를 통해 본 네덜란드 남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내 표정을 보고 의증을 안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그 중국 사람이야. 하도 반복해서 떠올렸더니 염이라도 뿌려졌나, 이방인도 볼 수 있게 되었군.”

  쓸쓸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관장의 모습은 물레방아를 통해 본 중국 남자와 확실히 겹쳐 보였다

  “언제부터 떠올리게 되었습니까?”

  관장은 찹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여자가 실종된 다음에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실종이라고요?”

  그는 천장과 벽면 경계의 어딘가 쯤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어렵게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 행방불명 됐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때부터 모든 게 망가지더라고. 모래로 쌓은 성이 무너지는 것처럼. 직장도 망하고 결혼도 파탄 나고. 그런데 이상하게 그 여자만 계속 생각나는 거야.”

  괴로움이 담겨진 관장의 눈동자가 축축하게 젖어 진득해보였다.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더라고. 그러면서 나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어. 아무래도 내가 기계에 밝으니까 물레방앗간을 맡기로 했는데, 알고 봤더니 이게 다 운명이었는지 어느 날부터 중국 남자와 홀랜드 남자, 헝가리 남자와 일본 남자의 생애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관장은 절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사람은 말이야. 태어나기 전에는 뭘 해야 할지 알았다가도 막상 태어나보면 세상에 정신을 온통 뺏겨버려서, 해야만 하는 것을 다 까먹어버린단 말이지! 풍차와도 같은 양수기와 물레방아 같은 제분기와 함께 그 여자는 나를 기다렸는데, 세속의 도락에 빠져서 그 여자를 영영 놓쳐 버린 거야! 고작 형상이 바뀌었다고 알아보지를 못하다니! 나는 참 머저리 같단말야!”

  관장은 자책하며 가슴을 주먹으로 크게 한 번 쳤다가, 잠시 후 숨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나도 모르게 이 벙어리 동산의 물레방아에 끌려져 온 것 같아. 여기서 중국 남자와 홀랜드 남자, 헝가리 남자와 일본 남자의 생애를 보고 나니까,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지. 이제 내 남은 생은 여기에서 물레방아를 보면서 속죄를 하고 추억을 투영해 보는 것만으로 족해.”

 

 

<5>

 

  “여자 분은 소식은 전혀 모르세요?”

  관장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죽었겠지.”

  나는 어째서인지 그 여자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관장은 주먹으로 탁자를 강하게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아껴 마시고 있던 커피 잔이 넘어지며 커피가 쏟아졌다.

  “남의 인생이라고 쉽게 얘기하는 건가!”

  나도 지지 않으려는 듯 나도 모르게 일어나 맞섰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관장님은 그 여자를 찾아봤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관장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참을 정지해 있더니 털썩 주저 않았다. 그리고는 금세 울먹이면서 말했다.

  “자네 말이 맞아. 그런데 멍청하게도 기회를 다 날려버렸어. 이혼을 하면서도, 자살을 결심하면서도, 여기에 오면서까지도 그 여자를 찾아야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못했어. 실은 무서웠던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도망을 쳐버렸어!”

   관장은 비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죽을 결심까지 했으면서 무서웠던 거야. 사실 죽으려고 했던 것도 다 도피하기 위한 거지. 여자를 찾으려고 모든 걸 다 바쳤는데 영영 못 찾으면 어떡하지? 잔인하게 죽어있으면 어떡하지? 다른 남자와 결혼 했으면 어떡하지? 모든 불확실성이 너무나 두려웠던 거야! 그런 건 0과 1처럼 딱딱 떨어지는 게 아니니까.”

  풀벌레 소리가 한층 짙어지며 숲의 향기가 전해져 왔고, 탁자 위의 누런 조명은 보다 선명해졌다. 관장은 모든 걸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에 와서야 알게 된 거지. 내가 그 여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가장 중요한 때를 놓쳐 버리고, 이렇게 생을 때우고 있는 거라네. 버러지 보다 못하지. 이런 건 삶도 뭣도 아니야!”

  관장에게 연민의 마음이 들면서 가슴에서 말이 저절로 나왔다.

  “관장님은 열심히 살았어요. 괴로워도 피하지 않고 계속 물레방아를 봤잖아요. 사람들은 진짜 자기의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하루하루 매 순간을 잊고 살지만 관장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나는 진짜 자기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 하루하루 매 순간을 잊고 사는게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늦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그 여자는 살아있을지도 몰라요. 관장님도 아직 살아 있잖아요.”

  얼굴을 감싸고 있던 관장의 두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렇구나! 살아있을 수도 있는 거구나! 그 생각을 왜 여태 못했을까. 평생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나도 모르게 죽어버린 걸로 간주해 버렸어. 비겁했어. 현실을 직면하기를 포기하고 있었어.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건데.”

  관장은 내 손에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왔다.

  “아! 그 여자가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여자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저렇게 감격해할 수 있는데,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러고 있었던 걸까? 돈을 되찾기 위해? 오구미에게 빌려준 돈 같은 건 애초에 받지 않아도 그만이다. 어쩌면 오구미에게 무작정 분노함으로서 상실감을 메꾸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동안 오구미가 나를 떠났다고만 생각했을 뿐, 왜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질 않았다. 오구미는 떠난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 아마도, 살아있을 것이다.

 

  눈을 뜨니 미역국이 끓여져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미역국인가. 오구미가 사라진 여름, 바닷가 낡은 식당에서 미역국을 먹은 적이 있으니까 대충 3년 만에 먹는 미역국이다. 이 물레방아관 보다야 덜 하지만 그곳도 시간을 한참이나 비켜난 곳이었다. 3년 동안 나는 대체 뭘 하고 살았던 걸까? 얼마나 엉망으로 살았는지 중간 중간이 끊겨있다. 그때는 속이 쓰려 미역국을 절반도 채 먹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다 비웠다. 물레방아로 가니 어김없이 관장이 있었다.

  “자네 와따주부에게 받을 돈이 얼마인가?”

  뜻 밖에 질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삼천만원 입니다.”

  관장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삼천만원? 고작 삼천만원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었단 말야?”

  삼천만원 때문이 아니다. 나도 이제 그것을 안다. 삼천만원은 나 자신을 오구미에게 묶어두기 위한 구실에 불과 했을 뿐, 나는 별처럼 반짝이던 오구미의 눈동자를 다시 한 번 마주하며, 왜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지, 그 이유가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 돈 줄게. 그 돈 줄 테니까 앞으로 이런데 와서 지내고 그러지마. 돈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 돼. 아직 젊고 기회도 많으니까 갱생할 수 있어!”

  관장은 금고로 보이는 곳에서 돈을 꺼내고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쉽게 돈을 받게 되니 기분이 생경했다. 이제 벙어리 동산을 떠나야만 하는 것인가. 오구미는 만나지도 못한 채로. 하지만 그보다, 애초에 오구미가 이 벙어리 동산에 돌아올 가능성이 있기는 했던가.

  “컴퓨터라는 것도 말야. 잘 되다가도 아무 이유도 없이 안 될 때가 있잖은가. 그럴 때는 주변의 어질러진 방을 정리한다든지, 뭔가 미루어났던 일을 처리하면 다시 아무 이유도 없이 잘되기도 하고 그래. 하물며 기계 따위도 그러는데 사람은 어떻겠는가. 자네도 자네의 삶 속에서 열심히  살다보면, 뭔가 좋은 소식이 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렇게 바로 떠나라고요?”

  “그래. 여긴 정상적인 사람이 살만한 데가 아니야. 그러니까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마.”

  관장은 돈 뭉치를 하얀 천에 쌓아 내밀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돈까지 갚아줬으니 더는 와따주부를 미워하지 말게. 자네가 얼마만큼 아는 진 모르겠지만 그 애는 어렸을 때 아픈 일이 많았어. 하지만 천사와도 같았어. 우리를 죽음의 강으로 부터 건져주었어.”

  관장은 내 손을 꼭 붙잡으면서 말했다. 

  “살다가 힘들어지면 우리를 생각해. 나와 목동도 살고 있지 않은가!”

 

 

<6>

 

  관장에게 떠밀리다시피 벙어리 동산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관장은 내가 진짜 삶으로 부터 도망치기 위해 하루하루 매 순간 망각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관장은 예리한 사람이다.

  관장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실종된 여자를 찾아 나설 수 있을까. 살아있을 가능성이 한 조각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죽었다고 해도,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하지 않을까. 설사 찾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관장은 이미 충분히 물레방아를 들여다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목동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지옥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까. 어쩌면 오구미를 찾아 나서야 할까. 마지막으로 벙어리 동산을 올려다봤다. 사람들은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저 작은 언덕에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생의 처절한 실상들이 숨어 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숨겨진 구석구석에는 얼마나 많은 벙어리 동산이 있을 것인가!

  내 평생 오구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별처럼 반짝이던 그날 밤의 그 눈동자를 나는 영영 잊고 살 수 있을까. 언덕을 내려오며 물레방아관에서 매일 밤 들었던 조용필의 노래가 머릿속에 자꾸 멤 돌았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 램프가 켜져 있는 작은 찻집에서 나 홀로 우리의 추억을 태워버렸다.’ 관장은 나는 아직 젊으니까 갱생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럴 수 있을까. ‘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 되겠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너는 나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 버렸다. 그대를 이제는 내가 보낸다.’ 오구미를 지워버린 채로 살 수 있을까. ‘사랑. 눈감으면 모르리. 사랑. 돌아서면 잊으리. 사랑. 내 오늘은 울지만 다시는 울지 않겠다.’ 어느새 눈시울이 젖었다. 나는 오구미를 정말로 사랑했구나!

  어느새 벙어리 동산의 출입구에 도달했다. 벌써 사십 여 일이 지났다. 들어올 때는 눈 여겨 보지 않았던 나무판이 눈에 띄었다. 나무판에는 큰 글씨로 ‘벙어리 동산’이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그 아래는 민속주점에서나 볼 수 있는 글씨체로 시인 것 같기도 하고 소개인 것 같기도 한 글이 적혀 있었다. 

 

자살을 꿈꾸는 자. 여기로 오세요

여기 벙어리 동산에서 말 없는 삶을 살아요

세상에 상처받은 자. 여기로 오세요

여기 벙어리 동산에서 말없는 삶을 살아요

 

울고 있는 건 당신만이 아니야

실패 했어도 희망이 없어도

고통을 직면하며 내세를 기약해요

 

신이 주신 생명을 소중히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우리는

빛을 잃은 우주의 보석. 호산나

 

  벙어리 동산을 빠져 나오자마자 젊은 우체부가 나타났다. 우체부는 숨을 크게 헐떡거리며 편지를 하나 내밀었다.

  "여기 올라오느라 아주 혼났습니다."

  나는 급한 마음에 편지를 허겁지겁 뜯었다.

 

  먼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자살 사이트에 가입했었던 여러분과 함께 갱생을 약속해 놓고는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려 다들 놀라셨을 거예요. 변명을 하자면 그동안 오구미에게는 미리 예측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일 들이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한 실상들이 튀어나와 해석과 해소의 시간이 필요했고, 여러 가지 과거와의 작별의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하루도 여러분을 잊었던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벙어리 싸이트의 시샵인 와따주부입니다. 매일 밤 목동 토토와 물레방앗간의 와타리, 농부인 짐보 할아버지와 양계장의 하연숙 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왠지 여러분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고는 했습니다. 무책임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제가 돌아올 거라는 걸 믿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음 달 중순에 여러분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남을 돕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부터 온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제는 강해졌기 때문에 우리들의 공동체를 함께 이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벙어리 동산’이라는 말없는 프로젝트는 중도에 무산 되었지만, 우리들은 ‘벙어리 동산’을 핑계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극도의 절망 속에서도 오랫동안 기다리면 만날 수 있는 위안을 얻었습니다. 자살 충돌을 억누르며 눈물로 일으켰던 처음의 기치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 말 없는 ‘벙어리 동산’에서, 생명을 노래하는 ‘병아리 동산’을 만들어야할 때입니다. 다음달에 봅시다. 와따주부 오구미 올림.

 

  편지를 다 읽고 나니 눈물이 주루륵 흘러내렸다. 오구미가 돌아오는구나! 정말로 돌아오는 구나!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조금 더 울었다.

  목동의 점괘는 정확했던 것이다. 목동은 ‘직접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오구미가 온다고 했는데, 오구미는 ‘직접’이 아니라 편지를 통해왔다. 편지 또한 곧 올 것이라는 소식을 담겨있으므로 ‘완전히’ 온 것은 아니지만 일부가 전해진 것이다. 점괘가 맞는 것으로 보아 목동은 정신이 나간 게 아닐지도 모른다.

  자리에서 일어나 벙어리 동산의 언덕을 다시 올랐다. 마음속에서 저절로 말이 솟아나왔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려두지 않을 거야. 벙어리 동산을 구해 낼 거야. 불쌍한 목동과 관장을 위해. 오구미와 함께. 생명이 있는 병아리 동산을 만들어 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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