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심 2016.06.1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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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있는 어느 제분소에서 일주일간 단기 알바를 하였다.

처음엔 외국인이라 써주지 않으려는 눈치였으나

결국엔 외국인이라 써주는 눈치였다.

 

나는 한국인들이 머무는 컨테이너 숙소와 달리

외국인들이 머무는 폐건물 합숙소에 배치 되었다.

 

그곳엔 영화에서 종종 봤던 나찌 합숙소와 유사하게

층층으로 이루어진 나무 침대가 있었다.

 

그곳은 초여름인데도 이상할 만큼 추웠으며

나무 침대는 매우 거칠어서 위로 올라갈때 

손이나 발에 가시가 찔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다행히 이불만은 보드라웠다.

 

러시아 남자와 우크라이나 남자와 함께 매일밤 보드카를 마셨다.

소세지 빵을 삼등분하여 안주로 나눠먹었는데, 

경리로 일하는 한국 여자가 나에게만 특별히 챙겨준 것이다.

 

우크라이나 남자는 경리가 나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귀뜸해주었다.

그리고는 다른 잘생긴 남자가 들어 왔을때 즉시 버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나는 다음날 부터 소세지 빵을 받지 않았다.

 

비록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나

린다를 져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틀날 부터 혹독한 라인으로 배치 되었다.

경리가 지닌 막강한 힘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남자와 우크라이나 남자와 함께 

초라한 하리보 젤리를 안주로 싸구려 보드카를 마실때

합숙소의 다른 남자들은 매일밤 어딘가로 나가 진탕 술을 마셨다.

 

그들은 임금의 대부분을 유흥비로 사용하는 것 같았고

코파 아메리카의 승부를 예측하는 도박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러시아 남자와 우크라이나 남자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고

나는 린다를 찾기 위한 여비를 모아야 했기 때문에 술집과 도박은 꿈도 못 꾸었다.

 

계약된 일주일이 끝나자 경리가 다가왔다.

 

"막심이 원한다면 거져 먹을 수 있는 쉬운 라인과 호사한 컨테이너 숙소."

"그리고 잘 익은 러시안 소시지를 매일 밤 제공할 수도 있어."

 

"조건은?"

 

"매일밤 나와 함께 잠들면 그만이야. 어때? 꿀이지?"

 

나는 경리의 비단 머플러를 보며, 아귀가 달리 있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경리는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며 증오의 목소리를 높혔다.

 

"원숭이 새끼같은 반역자 스키야! 잘 대해줬더니 은혜도 모르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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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밤, 자축을 해준다며 러시아 남자와 우크라이나 남자가

어렵게 구한 러시안 소세지 한 줄과 보드카를 두어 병 가져왔다.

얼마 후, 러시아 남자는 술에 잔뜩 취해 연신 푸틴을 칭송하더니 뜻밖의 소리를 했다.

 

"예전에 엘브르스 산을 등반한 적이 있었어."

"너무 힘들어서 하산을 하지 않고 중턱에 침낭을 펴고 야영을 했지."

 

우크라이나 남자는 벌써 취해 잠에 들어 있었다.

러시아 남자는 중요한 비밀을 얘기하듯 진중하게 속삭였다.

 

"가끔 육체가 지쳤을 때는 꿈 속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낼때가 있지."

"나는 무려 열흘 동안 목초지에서 소를 치는 고된 일을 했어."

"하루 종일 일하고 스프를 먹고 잠들고 또 일을 하고를 무려 열흘이나 반복했다고."

"그런데 깨어나보니 엘브르스 산의 침낭 속이었어."

"단 하룻밤 사이에 무려 열흘간의 댓가 없는 노동을 한 셈이야."

 

러시아 남자는 잔뜩 음험한 표정으로 베시시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바로 지금의 자네처럼 말이야."

"자네는 꿈 속인지도 모르고 멍청하게 노역을 치른게지!"

 

러시아 남자의 깔깔 거리며 웃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러시아 남자의 웃음 소리는 어느새 경리의 웃음 소리로 변해 있었다.

 

"깔깔깔! 이 나와 동침했으면 일도 적게 하고 매일 같이 소세지도 먹을 수 있었을텐데!" 

"사서 고생하는 원숭이 새끼같은 멍청이 스키로구나! 깔깔깔!"

 

와해되는 정신 속에서 내내 몸부림 쳤다.

 

"꿈 속이라고 해도 나는 린다를 져버리지 않아!"

"설사 푸틴을 따라갔다 해도 나는 져버리지 않아!"

 

갖은 악몽과 가위눌림 속에서 그나마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우크라이나 남자가 잠꼬대로 중얼거리는 

동방전례 카톨릭의 옛 기도문이었다.

 

아름다운 명금류의 노랫 소리에 합숙소 나무 침대에서 깨어났다.

다행히도 제분소에서의 지난 일주일은 한날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술에 덜깨 얼떨떨한 러시아 남자는 어젯밤 일은 커녕,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우크라이나 남자는 양피지에 직접 그린 그림을 선물로 주었다.

이제는 더 이상 우크라이나가 아닌 크림 반도의 흑해 연안이 그려져 있었다.

흑해는 어린 시절 물놀이를 한 적이 있어 나에게도 각별한 곳이다.

 

반면 경리는 여전히 악의에 찬 시선으로 임금 봉투를 내던졌다.

정산해 보니 아무래도 3만원이 부족했다.

 

"체브라시카 새끼같은 교활한 스키야!"

"설마 소세지 빵을 공짜라고 여긴 건 아닐테지?"

 

노동자 모두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오는 길에 

몰래 화장실 앞에서 소세지 빵을 먹고 있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카자흐스탄 출신의 신참을 만났다.

그는 도둑도 아니면서 제발저리 듯 항변했다.

 

"핫산, 이 빵 흠친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나는 멀리 히말라야를 넘어 이곳까지 오게 된 어린 핫산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알아요. 다 알아. 핫산."

"다만 그 빵이 공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 두세요."

 

인샬라. 라고 인사하고 제분소에서 빠져나왔다.

천원을 내고 버스를 타니 사십이만사천원이 남아있었다.

 

이 걸로 린다와 적어도 한 발자국은 까까워진 것이리라.

그렇게 믿기로 했다.

Commen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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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줌보 2016.06.17 18:34

    러시안 소세지 넘 맛나겠다!
    유로 2016을 보면서 발티카랑 먹으면 넘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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