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대 그 사나이

by 안채호 posted May 11, 2014

'안톤 체호프'를 좋아하는 '안채호'입니다. 

쓰여지기는 2014년에 쓰여졌지만, 15년 전 채호의 시점에서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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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훌쩍 넘은 사나이의 얼굴은 비장해 보였다. 곧 바리깡이 다가와 사나이의 머리를 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나이의 머리는 이미 (삭발과 별 다를바 없는) 반삭이었고, 때문에 투쟁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아까운 머리를 민다는 느낌보단 차라리 이발을 하는 느낌에 가까웠다. 아마도 사나이는 한 달이 멀다하고 삭발식을 거행해왔을 것이고, 때문에 머리가 자랄 틈도 채 없었던 것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나이는 대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인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요구사항을 외치고 있는 사나이는 또다시 졸업을 고사(固辭)하였다고 한다. 오직 투쟁을 위하여! 학우들의 권익을 위하여! 학생회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이미 서른이 넘었는데도 이 곳 초당대학교에 더 머물기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나는 학생회에서 나누어 준 유입물을 들여다보았다. 교육의 질에 대해, 등록금에 대해, 여러가지 요구사항이 적혀있었는데, 내 눈에 띄는 것은 기숙사 서비스에 대한 부분이었다. 인근 대학인 대불대 기숙사는 초당대 기숙사 보다 한결 저렴함에도 불구, 기숙사 전체에 LAN선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내게도 조금 충격이었다.

 

이 곳 초당대 기숙사는 인터넷은 물론 PC 통신조차 될리 없으니, 컴퓨터가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디오 CD를 빌려 철지난 방화를 보거나, 레밍즈 같은 고전게임을 하거나, 워드 프로세서로 수기를 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대불대 기숙사는 재빠른 LAN선이 깔려있으니, 최신 락 밴드의 뮤직비디오를 다운로드 할 수도 있으며, 인기 머그 게임인 바람의 나라는 물론, 포트리스도 할 수 있으니, 불교재단인데도 불구하고 세속적으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이제 몇일 후면 이 학교를 영영 등질 처지이니 억울해 하기에도 늦었다. 그 보다는 사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나이는 벌써 몇년 동안이나 진급과 졸업을 마다한채 이 학교에 청춘을 묻어왔다. 고향도 가족도 취업도 등진채 좁은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째서 자신의 소중한 인생의 전반부를 이 초당대학교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일까! 혹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굳게 믿는 탓에, '어차피 서너달 후면 세상은 멸망할테니까! 그러니 어디서 뭘 하든 상관 없어!' 하고 냉소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 곳 초당대는 전라남도 무안군 성남리에 위치하고 있지만 사실 학생의 과반수 이상이 서울 출신이다. 이 곳 초당대는 입학하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지만 (정원의 반도 채우지 못한다.) 졸업하는 사람은 더 희박하다. (정원의 반의 반의 반도 채우지 못한다.) 모두 1~2년 새에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다. 나만 해도 고작 한 달도 못되서 그만두길 결정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서울 등 멀리에서 왔음에도 10년이 지나도록 이 곳 무안군 성남리에 머무는 자들도 있긴 하다. 물론 그들이 이 곳에 머무는 이유는 그 남자처럼 의로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서거나, 학교에서 연구를 하기 위해서거나, 그런게 아니다. 그들은 대게 신입생때 눈이 맞은 CC와 동거를 하다가 덜컥 자식이 생겨버렸고,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양파를 나르는 자들인 것이다. (무안군은 양파로 유명하다.)

 

그들은 학교는 진작에 그만뒀음에도 이왕 살던 곳을 옮기기는 뭣하고, 양파 나르는 삯도 제법 솔솔하여 아예 이 곳을 터로 잡은 자들이다. 게중에는 자신은 학교를 그만두고 양파를 나르고 있음에도, 아내 만큼은 학교를 무사히 졸업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정성 지극한 남자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나이는 어떤가? 가정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다. 오직 학우들과 후배들을 위해서, 초당대의 미래를 위해서, 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

 

낮술을 마시러 읍내로 가는 택시 안에서 계속 사나이의 결연한 표정이 아른거렸다. 순간, 어쩌면 영웅심리 때문인가? 권력욕 때문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사나이는 '학생회장'이란 필생(畢生)의 마지막일지 모를 감투를 내려놓기가 못내 아쉬웠던 것이 아닐까? 지나친 생각이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거도 없이 사람을 의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1차로 낮술을 마치고, 2차로 저녁술을 마시기 위해 다른 술집으로 이동하다, 문득 유난히도 노을이 붉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같이 걷던 광명 출신의 남자는 헤롱거리며 언제나처럼 뻔한 소리를 했다.

 

"서울 진로 소주는 야비해서 먹다보면 갑자기 뒷타가 뻑하고 오지만, 이 곳 전라도 보해 소주는 솔직해서 마시면서 바로 취하는 게 느껴진다니까!"

 

노을은 논바닥을 삽시간에 시뻘겋게 물들였고, 비틀거리며 걷다보니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세기말적 환영(固辭) 속에 들어와 버린 것만 같았다. 알콜에 의해 꿈도 목적도 닦여져 나간 것만 같다. 하지만 사나이라면, 사나이라면 어떨까? 사나이에게 이 붉은 풍경은 어떤 식으로 보일 것인가!

 

마부스(Mabus)의 출현을 재촉하는 흉몽(固辭)으로 보일 것인가. 이름모를 열사(烈士)가 뿌리고 간 뜨거운 피로 보일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투쟁으로 성공적인 변화를 이룩해낸 뉴 밀레니엄 초당대의 불타오를 내일이 보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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