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벙어리 동산

by 동시성 posted Mar 0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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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주에서 내려와 이 곳에 머문지 어느덧 한 달이 되어 간다. 오구미는 오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오구미는 이미 누군가와 혼인하여 외국으로 영영 토껴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돈을 되찾으려면 이 정도의 수고는 감당해야 한다.

 

여기와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먹고 자고 싸는 것 외에 소를 지켜보는 일 밖에는 없다. 먹는 시간을 다 합해도 하루에 채 사십분을 넘지 않으며 싸는 시간도 고작해야 이십여분이다. 자는 시간도 일곱 시간을 넘지 않으니, 나머지 열여섯시간, 즉 하루의 삼분의 이를 오직 소를 지켜보는 일에만 할당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독서도 해보고 운동도 해보고 등산도 해보며, 아무리 돈을 받으러 온 빚쟁이 신세지만 나름대로 인간 답게 있어보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목동이랑 둘만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목동에게 동화되어 하루종일 멍하니 소만 지켜보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환경에서도 마음의 경건함을 지녔던 알픙스 도테의 별에 나오는 목동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졌다.

 

목동은 소를 지켜볼때 만큼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이따금 내가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는 것인지 영 대답이 없었다. 아주 가끔, 대충 이 삼일에 한 번쯤 내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었는데, 오늘이 그 날이다.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랐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소를 보는 것이 지겹지는 않소?"

"아, 달리 할 것도 없는데요. 뭘."

 

목동은 아주 오랜만에 나를 또렷이 쳐다보며 말했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

"나야 일이라서 견딘다지만 그짝도 참 대단하구먼. 젊은 사람에겐 쉬운 일이 아닐텐데.”

 

"이게 겨우 한달인데요. 뭘. 그보다 목동께선 소를 지켜보신지 십년이 넘었다고 들었는데요."

  

목동은 뭔가를 어렵게 떠올리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IMF가 난 다음에 거 뭐더라, 월드컵 4강인가 뭔가 올라갈때 쯤 들어왔으니까 십년은 진즉 넘었겠구먼.”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들어 왔다고? 그렇다면 목동은 벌써 15년 가까이를 이곳에서 소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가슴 속으로 울컥하는 느낌과 동시에 두려움이 느껴졌다. 목동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밤이 되어 산장으로 내려가면서도 계속 가슴 속에 무거운 것이 느껴졌다. 

 

목동이 스튜를 끓이는 동안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도 가끔씩은 문명의 이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삶의 활력을 줄 수 있는 취미가 생기거나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목동에 등 뒤에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한달간 소를 지켜봤더니 나름대로 어떻게 소를 대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내일은 제게 소를 맡기고 읍내라도 나가서 즐기고 오시는 건 어떨지요?"

 

그러자 목동은 스튜를 젓던 국자를 냄비 속에 턱 집어던지고는 고개를 휙돌려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노려 보며 소리쳤다.

 

"도회지 말이야? 드러운 거짓과 탐욕이 넘쳐나는 벼락맞을 도회지! 거길 내가 왜 간당가!"

 

나는 그제야 목동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틀림없이 바깥 세상에서 큰 상처를 입고 이곳 벙어리 동산으로 도망쳐온 것이 분명하다. 오구미는 이런 가련한 사람들을 모아서 일을 시키며 부당이익을 취해온 거겠지? 내 돈을 떼어 먹은 것도 모자라 이런 패륜적인 짓을 일삼아왔다니, 나는 오구미에게 더욱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오구미, 망할년! 별처럼 반짝이던 눈동자 만을 믿고 돈을 빌려줬는데! ‘와따주부’라는 우숩지도 않은 닉네임으로 이런 가련한 자들 위에서 군림해왔단 말인가? 서양인과 혼인하여 외국으로 토껴 버렸다는 소문도 있던데. 어떻게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을까. 개도 한 마리쯤 기르고 있겠지? 개와 서양인은 모를 것이다. 별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 속에 숨겨져있는 그 여자의 무서운 본색을!

 

잠자리에 누워서도 벙어리 동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계속 마음이 쓰였다. 오구미에 대한 미움에 잠이 오지 않았다.

 

오구미, 너는 벙어리 동산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동산은 말이 없지만 너를 애타게 기다린다. 목동도 얼마남지 않은 사람들도 다수의 소와 개들도 마찬가지다. 멋대로 정을 뿌리고서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면 안되는 것이다. 너는 돌아와야 한다. 니가 뿌린 씨앗을 거두어야 한다. 벙어리 동산이 이처럼 절규하고 있지 않은가!

 

새벽에 일어나 막 잠에서 깬 태양이 벙어리산(啞山) 능선 위를 시뻘겋게 비추는 것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을때 목동이 어느새 다가와 말했다.

 

"와따주부가 돌아올지도 모르겠구먼. 다만, 직접 완전히 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라고? 와따주부가 돌아온다고? 하지만 직접 완전히 오는 것인지 모른다는 말에 마음이 쓰였다.

"직접 완전히가 아니라면 어떻게 오는 겁니까? 잠깐 왔다 가는 식인가요?"

 

목동은 고개를 슬슬 저으며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말했다. 

"이런 건 아날로그라서 디지털처럼 딱딱 떨어지는게 아니지.”

 

목동의 말을 믿기로 했다. 달리 믿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구미는 곧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금방 내뺄지도 모르기 때문에, 오는 즉시 잡을 수 있도록 동산의 입구와 제일 가까운 물레방앗간으로 장소를 옮기기로 했다.

 

목동과 헤어지면서 악수를 나누었다. 목동은 아까보다는 훨씬 분명해진 눈동자로 말했다.

 

"죽은 아들과 닮아서 하는 말인데, 이런 곳에 와서 살면 안돼."

 

 

<2>

 

물레방앗간은 ‘물레방아관’이 되어있었다. 방앗간의 기능을 상실한지는 오래이나 그래도 물레방아가 온전히 남아있으니 일종의 박물관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관장은 설명했다. 친환경 탈곡과 제분을 위해 유지되던 물레방아간은 벌써 6년 전에 문을 닫았다. 관장은 물레방아간을 닫으며 물레방앗간 수석 제분사에서 물레방아관 관장으로 셀프 취임하였는데, 대체 어느 누가 이 산골에 처박혀 있는 수상한 공동체에서 물레방아 전시를 관람 하겠는가. 

 

용도가 불분명해진 이 수상한 공간은 우주에서 몰래 버려지기라도 한 것 처럼 모든 것이 낡아 있었고 모든 것이 비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겨울에 찾아간 야외 수영장 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오구미가 만든 또 하나인 폐허, 하지만 이런 곳에도 사람은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관장에게 물었다.

 

"어째서 오구미는 오지 않는거죠?"

 

관장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 정말 와따주부가 올거라고 생각한거요?"

 

"목동께서 올거라도 했습니다. 직접 완전히는 아니더라도요.”

 

관장은 껄껄껄 호탕하게 웃으면서 갑자기 나를 편한 사람 대하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돈 받으러 왔다길래 뭐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자네도 여간내기가 아니구먼. 아니, 목동의 말을 그렇게 쉽게 믿어 버리면 어떻게 하나? 자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말을 너무 쉽게 믿어버리는 거 아냐?”

 

나는 주먹을 쥐고 항변했다. "돈은 받아야겠는데 딱히 기댈 곳도 없고, 저도 속는셈 치고 믿어본 겁니다!”

관장은 적당히 내 말을 치우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 그건 그렇다치고, 아까 직접 완전히 뭐라고 하지 않았어?"

 

관장은 기억력이 좋고 예리한 사람인 것 같았다. 말 수가 적고 두루뭉실하던 목동과는 반대 타입이다. 

"목동께서 와따주부가 직접 완전히 오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관장은 신이 난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탁탁 치면서 말을 시작했다.

 

"벌써 말에 어폐가 있잖아. 아니, 사람이 오면 오는 거고 안오면 안오는 거지. 직접이 아닌 건 뭐고 완전히가 아닌 건 또 뭐야? 절반만 온다는 거야? 아니면 유령이 온다는 거야? 알 수가 없잖아. 그 양반은 너무 아날로그 적이야. 매사에 맺고 끊음이 정확하지 못하고 흐리멍텅해. 너무 소만 오래 쳐다봐서 그렇게 된거라구!”

 

관장은 말을 하면서 어떤 마디마다 탁자를 치는 강박증적인 버릇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 탁탁탁 거리는 소리는 불규칙한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리드미컬하여 적당한 진행감을 부여하였다.

 

"그런데 그 양반이 와따주부가 온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목장에는 인터넷도 안 깔려 있는데 이메일을 받았을까? 전화선도 안 깔렸는데 전화를 받았을까? 그게 아니면 비둘기가 편지를 물어다 줬을까? 어쩌면 텔레파시로 교신을 했는지도 모르지!”

 

나는 그제야 아뿔사!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도 인터넷도 없이 인편을 통한 교류도 없이 홀로 살고 있는 목동이야말로 와따주부에 대한 정보를 들을 통로가 전혀 없다는 것을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한 달 내내 소만 보고 있었더니 나도 모르게 얼이 빠져버렸나 보다. 관장은 다시 탁자를 두드리며 말을 시작했다.

 

“목동, 그 양반은 소를 너무 오래 봐서 미쳐 버렸어. 원래도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 양반, 옛사람들이 별자리를 보듯이 소의 얼룩의 변화를 보며 길흉화복을 점친다는데, 그거 믿을 수 없는 거 아니겠어?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소점? 얼룩점? 소얼룩점? 여하튼 그 양반도 딱히긴 딱하지. IMF때 쫄딱 망해서 가족들도 죄다 죽고 자기만 저렇게 살아서 왔다는구만."

 

충격적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점이나 주술 같은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목동의 말에 완전히 신뢰를 잃었다. 목동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소의 얼룩을 보고 미래를 점친다는 것은 몹시도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달리 어쩌겠는가! 나는 어차피 오구미가 올때까지 기다릴 참이고 마침 소를 보는 것에 신물이 났으니 이제부터는 이곳 물레방아관에서 물레방아만 보고 있으면 그만이다. 돈을 되찾으려면 이 정도의 인내는 필요한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 잡고는 물레방아관에서의 첫 잠자리에 들었다.

 

일본제 접이식 침대를 배정 받았는데 자리는 그런데로 편안했다. 다만 관장이 설치해놓은 구가 돌아가는 형태의 파란 조명이 천장에 비쳐 거슬렸다. 한밤중에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너울거리는 파란 불빛 아래 있다보니 일상적인 공간이 아닌 것 같아 잠이 오질 않았다. 우주에서 잊혀진 어느 대기실에서 한없이 대기하고 있는 듯한 공허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부터 본격적으로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삶이 시작되었다. 달리 할 것도 없었을 뿐더러 다른 것을 하자니 생각만 복잡해질 것 같았다. 하루의 삼분의 이를 물레방아 돌아가는 것만 지켜보고 있자니 정신이 점처 헐렁헐렁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치지도 않고 침착하고 끈기있게 물레방아를 지켜보고 있는 관장에서 경이감이 느껴졌다. 관장에게 물었다.

 

"목동께서도 그렇지만 관장님도 대단하십니다. 어쩌면 한결같이 한 가지만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관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냥 생을 떼우는 거지. 목동이나 나나 사실상 우리는 끝났잖아. 단순한 것이 좋아. 최대한 안 사는 것처럼."

 

최대한 안 사는 것 처럼 사는 삶이라니.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었기에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까? 나는 목동에 이어 다시 한 번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왜 하필 물레방앗간을 택하셨어요?"

"물레방아를 보며 속죄를 하고, 또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서."

 

다음 말을 기다렸으나 관장은 더이상 말이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물레방아에 시선을 돌렸다. 물레방아를 보며 관장이 한 말을 떠올렸다. 물레방아를 보며 속죄를 한다. 물레방아를 보며 추억을 떠올린다. 물레방아를 보며 추억을 떠올린다. 그렇게 한참을 물레방아를 보고 있자니 어떤 아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아픔 같지가 않았다. 물레방아를 보며 그 아픔에 계속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여러 이미지와 함께 어떤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것들을 따라갔다.

 

 

<3>

 

아마도 중국 사람인 것 같다. 물레방앗간에서 쉼없이 일을 한다. 언제나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며 같은 것을 먹으며 같은 일을 반복한다. 물레방아갓의 한 구석에 낡은 침대와 약간의 생활 도구와 집기가 있다. 좀처럼 그곳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만나야할 친구도 가족도 없다. RPG 게임에 나오는 NPC 같은 삶이다.

 

그러나 이따금 밤중에 여인이 찾아온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행색을 보면 방앗간 지기보다 신분이 한참은 높다. 어쩌면 물레방앗간 주인의 딸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때로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소리가 그들의 운명을 재촉하는 것처럼 들린다. 남자는 가끔 여자에게 말 없이 말한다. '비천한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그러면 여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다.

 

여자가 오지않는 밤에는 남자 혼자 물레방아를 바라보곤 한다. 어떤 날은 마음이 아파져 온다. 물레방아를 보다 보면 알 수 없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때가 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남자는 키가 큰 네덜란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개의 풍차간을 운영하는 부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단지 풍차간만 운영하는 경영자가 아니라 풍차를 다룰줄 아는 기술자 이기도 하다.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유복하게 살던 그는 풍차간에 새로 들어온 이주노동자인 집시 소녀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어릴때부터 동네에서 알던 소꿉친구였던 아내에게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다. 그는 자신이 결혼을 해버린 것이 실수 였음을 단번에 깨닫는다. 하지만 이미 한참 늦어버렸다. 그와 집시 소녀는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외딴 풍찻간에서 밤마다 사랑을 나눈다. 

 

남자는 말한다. '너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해버려서 미안해.' 그러면 집시 소녀는 '아니에요. 이렇게 천한 나를 사랑해주는 것 만으로도 고마워요.'라고 말한다. 남자는 세상에서 비난과 버림을 받더라도 이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바로 그날 밤, 풍찻간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이 장모와 하녀에게 발각 된다.

 

장인은 집시 소녀를 추방시킨다. 집시 소녀가 재산을 빼앗기 위해 술과 향을 이용해 주인집 남자를 꼬여낸 것으로 일을 마무리 하려는 듯하다. 남자는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으나 그랬다가 오히려 집시 소녀가 죽임을 당할지도 몰라 그만 둔다. 남자는 마을에서 추방 당하는 집시 소녀가 바닷가 언덕을 넘어가는 모습을 제일 높은 풍찻간 꼭대기에서 바라보며 꺽꺽하고 울었다.

 

물레방아를 보던 중국인 남자도 어느새 울고 있었다. 남자는 초조한 마음으로 방을 동동 굴렸다. 그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그 집시 소녀는 언덕을 넘자마자 바로 살해 당했다는 것을! 집시 소녀는 자신의 처할 운명을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몰랐다. 밤이 되자 여자가 찾아왔다

 

"우리는 예전에도 지금 상황과 비슷했던 적이 같아. 이대로 가다간 죽임을 당하게 될거야. 당신은 이제라도 나를 떠나 약혼자에게 가는 것이 좋겠어!"

 

그러자 여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치도 않아요! 나는 절대 왕하오에게 가지 않아요! 당신이 날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철철 흐르는 여자의 눈물을 보며 남자는 결심을 했다. "우리 여기서 도망치자. 도망칠 채비를 하고 내일 밤에 다시 만나는 거야!"

 

남자가 여자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밤 여자는 자신을 의심하여 뒤를 밟게한 약혼자에게 살해를 당했고, 남자 역시 곧 여자의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남자는 눈물에 젖은 여자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이던 그 아름답던 밤에, 왜 바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두고 두고 후회를 하며 죽었다.

 

"이봐. 괜찮은가?"

 

관장이 어깨를 툭 치자 나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관장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자네 혹시 보았나? 중국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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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장은 내 앞에 직접 내린 커피를 내밀었다. 벙어리 동산에 온지 사십일이 지났지만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건 처음있는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기계에 관심이 많았어. 라디오니 계산기니 뭐든 뜯어보길 좋아했지. 서울방송이 처음 나왔을때는 그걸 보려고 여기저기 쇠붙이를 이용해 안테나를 수제작했는데, 원하던 서울방송은 안 나오고 정체모를 중국 방송이 잡히지 뭐야!”

 

관장은 나를 넌지시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자네 세대는 90년대 초반에 수제 안테나로 외국방송을 접해보는 게 어떠한 경이인지 이해 못하겠지만, 당시 열세살 짜리의 눈에는 그건 우주와의 접촉과도 같은 거야. 아까 자네가 물레방아를 통해 중국 사람을 본 것과도 비견할 수 있지."

 

관장은 무언가 새로운 기억에 접속이 됐는지 탁자를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나에게 컴퓨터는 경이로운 세계였어. 8비트시절부터 빠져들었지. 그때는 허큘레스 모드 그래픽만 봐도 감동이었어. 베이직이나 코볼이니 참으로 쓸데없는 프로그램들도 다 배우고, 남들따라 음악을 하겠다고 아타리 컴퓨터를 배운 적도 있었지. 공부 만큼은 못해서 상고에 진학하고 군대를 갔다 와서는 곧바로 용산에 취직하게 되었다네."

 

관장은 어느새 시무룩한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물레방아에서 돌아가는 소리가 저녁 공기와 어울려 시원하게 전해져왔다.

 

"나는 도시로 왔지만 그 여자는 시골에서 계속 자랐어. 내가 컴퓨터로 페르시아의 왕자를 하고 있을때 그 여자는 양수기를 보며 자랐고 내가 컴퓨터로 오성식의 생활영어를 보고 있을때 그 여자는 제분기를 보고 있었던 거지."

 

나는 너무 아무말도 안하고 듣기만 하는 것 같다고 느끼던 와중에 마침 아는 것이 하나 나와 말을 꺼냈다.

 "그 오성식 CD롬 타이틀은 저도 해봤는데 정말 조약했습니다. 오성식이 발음하는 동영상 하나 보려고 엄청 오래 로딩했으니까요."

 

관장은 나의 말을 눈짓으로 간단히 응답했다. 어느새 관장이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그 여자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관장은 괴로운 표정으로 다소 과격한 어조로 섞어가며 말했다.

 

"사실 이번 생은 절호에 기회였어.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어릴때 부터 잘 알았거든. 그런데 나는 너무 오만해 졌던거야. 용산에서 고작 200만원 조금 넘는 돈을 벌면서 콧대가 높아져서는! 도시 문명의 쾌락에 빠져서 그 시골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았던 거지! 그래서 또 부질없는 실수를 해버렸다네.”

 

약간은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어떤 실수를 했다는 겁니까?”

 

관장은 탄성을 내지르듯 말했다.

"또 다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리고 말았다네!"

 

나는 역시나! 했지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얘기를 듣고보니 짐작했던 것 처럼 이 사람은 내가 물레방아를 통해 본 중국 남자가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국 남자가 물레방아를 통해 본 네덜란드 남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내 표정을 보고 의증을 안다는 듯 말했다.

 

"그래. 아마도 나는 그 중국 사람이었다네. 하도 반복해서 떠올렸더니 염이 뿌려 졌는지 이방인도 볼 수 있게 되었군."

 

쓸쓸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관장의 모습은 물레방아를 통해 본 중국 남자와 유사하게 겹쳐 보였다

"언제부터 중국 사람을 떠올리게 되었습니까?"

 

관장은 찹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여자가 실종된 다음에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실종이라구요?"

 

그는 천장 어딘가쯤에 붙어있는 무언가를 응시하는 듯한 눈동자로 어렵게 말을 이어나갔다.

 

"어느날 행방불명 됐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여자가 계속 고향 동네에 살고 있어서 소식을 다 알았거든. 그때부터 모든게 망가지기 시작한거야. 직장도 망하고 결혼생활도 파탄나고. 그리고 이상하게 그 여자만 계속 생각 나는거야."

 

괴로움이 담긴 관장의 눈동자는 축축하게 젖어 번질거렸다.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러면서 나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가 여기로까지 오게 되었네. 물레방앗간이 있길래 내가 맡기로 했지. 수동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기계쪽이니까. 알고 봤더니 이게 다 운명이었는지 어느날 부터 중국 남자와 네덜란드 남자와 일본 남자의 생애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야!”

 

관장은 절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사람은 말이야. 태어나기 전에는 뭘해야 할지 알았다가도 막상 태어나보면 세상에 정신을 온통 뺏겨버려서 원래 하려고 했던 것을 다 까먹어버린단 말이지! 그 여자는 풍차와도 같은 양수기와 물레방아 같은 제분기와 함께 나를 기다렸던 건데, 나는 세속의 도락에 빠져서 그 여자를 영영 놓쳐 버린거야! 고작 형체가 바뀌었다고 알아보지를 못하다니! 병신 같이 말야!”

 

관장은 탁자를 크게 내리치며 자책했으나 이내 숨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나도 모르게 이 벙어리 동산의 물레방앗간에 끌려져 온 것 같아. 여기서 중국 남자와 네덜란드 남자와 일본 남자의 생애를 보고 나니까, 내가 이번 생애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지. 나는 여기에서 물레방아를 보면서 속죄를 하고 여러 추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족해."

 

 

<5>

 

"그 여자분의 소식은 더는 모릅니까?”

 

관장은 당연하다는듯 말했다.

"죽었겠지."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그 여자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관장은 즉시 주먹으로 탁자를 강하게 치며 일어났다. 덕분에 커피잔이 출렁이며 커피가 쏟아졌다.

 

"남의 인생이라고 쉽게 얘기하는 건가!"

 

나는 나도 모르게 지지 않으려는 자세로 똑바로 일어나 말했다. 

 

"아닙니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닙니까? 관장님은 실종된 그 여자를 찾았어야 하는게 아닙니까?"

 

그러자 관장은 털썩 주저 않았다. 그리고는 금새 울먹이면서 말했다.

 

"자네말이 맞아. 그 여자를 찾았어야 해. 근데 나는 멍청하게 기회를 다 날려버렸어. 이혼을 하면서도 여기에 오면서까지도 그 여자를 찾아야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못했지. 나는 두려웠던 거야. 나도 모르게 도망을 친거지!“

 

관장은 비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자를 찾으려고 마음을 다 바쳤는데 막상 죽어있으면 어떡하지? 못 찾으면 어떡하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그 불확실성이 너무나 두려웠던 거야! 그런 디지털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시작도 못해본 거라고!"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냄새가 전해져 왔고 탁자 위의 누런 조명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관장은 모든 걸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물레방아관을 쓰윽 둘러보더니 말했다.

 

“여기에 와서야 분명히 알게 된거지. 내가 그 여자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걸. 제일 중요한 때를 놓쳐 버리고, 이렇게 삶을 때우고 있는 거라네."

 

나는 관장에게 연민의 마음이 느껴지면서 저절로 말이 나왔다.

 

“관장님은 열심히 살아왔어요. 괴로워도 피하지 않고 계속 물레방아를 봤잖아요. 사람들은 진짜 자기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하루하루 매 순간 자신을 잊고 살잖아요. 관장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늦지 않았을지 몰라요. 그 여자는 살아있을지도 몰라요.”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나는 진짜 자기 삶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하루하루 매 순간 자신을 잊고 사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장은 어느새 내 손을 잡고 울고 있었다.

 

"그렇구나! 살아있을 수도 있구나! 왜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야 했을까! 평생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나도 모르게 죽어버린 걸로 간주해 버린거야! 내가 비겁했어!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되는 건데! 아아아! 그 여자가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왔다. 여자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저렇게 감사해할 수 있는데. 나는 지금 대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이 곳에 처박혀 있었단 말인가. 정말 돈을 되찾기 위해서 인가? 와따주부, 아니 오구미에게 빌려준 돈 같은 건 애초에 받지 않아도 그만이지 않았던가!

 

다음날 눈을 뜨니 미묘하게도 미역국이 끓여져 있었다. 매일 인스턴트만 내놓던 관장으로선 별 일이다. 확실히 어젯밤에 감흥이 있었던 모양이다. 밥을 먹고 물레방아로 가니 관장이 어김없이 앉아있었다. 나를 본 관장이 물었다.

 

"자네 와따주부에게 받을 돈이 얼마인가?"

 

뜻 밖에 질문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삼천만원 입니다."

 

관장은 어의없다는 듯 말했다. "삼천만원? 고작 삼천만원 때문에 여태 이 곳에서 잠복을 했단 말야?"

 

물론 삼천만원 때문이 아니다. 나도 이제 그것을 안다. 삼천만원은 나 자신을 여기에 묶어두기 위한 구실에 불과 했을 뿐, 나는 별처럼 반짝이던 오구미의 눈동자를 다시 한 번 마주하며, 왜 아무런 말도 없이 내게서 떠났는지 그 이유가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 돈 줄게. 그 돈 줄테니까 앞으로 이런데 와서 지내고 그러지마. 돈에 너무 연연해서는 안돼. 아직 젊고 기회도 많으니까 갱생할 수 있어. 나를 보라구. 이런 나도 살고 있고 목동도 살고 있지 않은가."

 

관장은 금고에서 돈을 꺼내고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쉽게 돈을 받게 되니 기분이 생경했다. 이제 벙어리 동산을 떠나야만 하는 것인가. 오구미는 만나지도 못한채.

 

"이런 곳에 다시는 오지 말게."

 

관장은 그렇게 말하며 하얀 천에 쌓인 돈 뭉치를 내밀었다. 이제 정말 가야만 하는가. 돈은 받아냈지만 오구미에 대해서 무엇하나 확실하게 알아낸 것도 없는데. 관장은 말했다.

 

"와따주부와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돈까지 갚아주니 와따주부를 더는 미워하지 말게. 그녀는 천사와도 같았어. 우리를 죽음의 강으로 부터 건져주었지."

 

관장은 나를 마중하면서 말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잃어 버려서는 안돼."

 

 

<6>

 

나는 관장에게 떠밀리다시피 벙어리 동산을 나오는 꼴이 되었다. 관장은 아직은 젊은 내가 이런 곳에 와있는 것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관장은 내가 진짜 삶으로 부터 도망치기 위해 하루하루 매 순간 망각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을 눈치챘을지 모른다. 관장은 예리한 사람이다.

 

관장은 앞으로 어떻게 할까. 그 실종 됐다는 여자를 찾아나설 수 있을까. 그 여자가 설사 죽었다고 해도, 관장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살아있다면, 끝까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설사 찾지 못할지리도 그것은 그것대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관장은 이미 충분히 물레방아를 들여다본 것이 아닌가. 

 

그리고 목동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얼토당토 않는 얼룩점을 치며 살고있는 그가 몹시 가엾게 느껴졌다. 관장은 정신세계를 지키고 있었지만 목동은 정신세계가 무너진 것만 같아 몹시도 안타까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벙어리 동산의 출구에 다다라 있었다.

 

그리고 출구가 입구가 되려는 찰라, 사십여일 전에 들어올때는 눈여겨 보지 않았던 나무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나무 안내판에는 큰 글씨로 ‘벙어리 동산 (Since 2002)’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그 아래는 민속주점에서나 볼 수 있는 글씨체로 시인 것 같기도 하고 소개인 것 같기도 한 아리송한 글이 적혀 있었다. 

 

 

자살을 꿈꾸는 자. 이리로 오세요

여기 벙어리 동산에서 말 없는 삶을 살아요

 

삶에 실패했어도 아무 희망이 없어도

여기 벙어리 동산에서 말 없는 삶을 살아요

 

울고 있는 건 당신 한 명만은 아니야

여기 벙어리 동산에서 내세를 기약해요

 

인생을 망쳤다면 다음 생의 밑거름을 만들어요

반성할 것을 반성하고 고통스러운 것을 고통스러워 해요

 

세상에서 상처받은 자. 이리로 오세요

여기 벙어리 동산에서 말없는 삶을 살아요

 

신이 주신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우리들은 빛을 잃은 우주의 보석

호산나

 

 

나무판에 다 읽고 나자, 때맞춰 우편 배달부가 나타났다. 우편 배달부는 숨을 헐떡 거리며 말했다.

 

"여기 찾느라고 혼 났습니다. 자 여기 편지요!"

 

나는 급한 마음에 편지를 허겁지겁 뜯었다.

 

 

오구미가 먼저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자살 싸이트에 가입했었던 여러분을 데리고 갱생을 위한 공동체을 만들어 놓고는 갑자기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려 다들 깜짝 놀라셨을거에요. 그동안 오구미에게는 미리 예측할 수 없었던 여러가지 운명적인 일들이 있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한 실상들이 튀어나와 해석과 해소가 필요했고 이것 저것과의 작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루도 여러분을 잊었던 적이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벙어리 싸이트의 시삽인 와따주부입니다. 매일 밤 목동 토토와 물레방앗간의 와타리, 농부인 짐보 할아버지와 양계장의 하연숙 양을 위해 기도 했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왠지 여러분이 조금씩 갱생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고는 했습니다. 무책임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랬습니다. 제가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믿고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음달에 여러분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남을 돕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 부터 온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는 훨씬 강해졌기 때문에 우리들의 세상을 함께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벙어리 동산’이라는 말없는 프로젝트는 중도에 무산 되었지만, 우리들은 ‘벙어리 동산’을 핑계로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극도의 절망속에서도 오랫동안 기다리면 만날 수 있는 위안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자살 충돌을 억누르며 눈물로 세웠던 처음의 기치를 잊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좋게 변화할 것입니다. 말 없는 ‘벙어리 동산’에서, 생명을 노래하는 ‘병아리 동산’을 만들어야할 때입니다. 다음달에 봅시다. 와따주부 오구미 올림.

 

 

편지를 다 읽고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륵 흘러내렸다. 오구미가 돌아오는구나! 진짜로 돌아오는 구나! 나는 출구와 입구의 경계선에 그대로 주저앉아 조금 더 울었다.

 

목동의 점괘는 정확했던 것이다. 목동은 '직접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와따주부가 온다고 했다. 와따주부는 '직접'이 아니라 편지를 통해 왔다. 또한 편지의 내용은 와따주부가 곧 올 것이라는 소식을 담겨있으므로 와따주부가 '완전히' 온 것은 아니지만 그 기운의 일부가 전해진 것이다.

 

점괘가 맞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목동은 정신이 나간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어떤 경지에 다다른 걸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벙어리 동산의 언덕을 올랐다. 온 몸에 땀이 흐르며 마음 속에서 저절로 말이 솟아나왔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놓치지 않을거야. 벙어리 동산을 구해낼거야. 불쌍한 목동과 관장을 위해. 오구미와 함께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통합할 수 있는) 병아리 동산을 만들어 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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